백수를 바라보는 노인을, 그것도 역사의 숱한 현장을 넘나들었을 시대의 증거자를 만나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분되는 일이었다. 특히나 그가 안중근 의사의 피붙이 가운데 중국 땅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 첫 대면은 긴장 그 자체였다.
안로길(安路吉·루시아), 올해로 97살. 1913년 3월 3일 안 의사가 자란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 청계동에서 태어난 안 여사가 안 의사로 인해 맺은 인연은 조국을 빼앗긴 민족의 신산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할아버지 대부터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안 여사는 1929년 16살 나이에 부모를 따라 한국에서 헤이룽장성 방정현(方正縣) 조선농장으로 이민했다 이듬해 안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홍근의 셋째 아들 무생과 결혼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결혼 다음해인 1931년 봄 안씨 부부는 교우촌이나 다름없던 헤이룽장성 해룬현 해북진 선목촌으로 이사가 농사를 지으며 2000여 신자들과 신앙을 지켜나갔다. 당시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켜 그 지역을 점령한 일제는 친일세력을 키우며 한편으로는 신자들을 탄압했다. 이 때 남편 안무생이 1944년 8월 27일 일제 앞잡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홀로 해방을 맞은 안 여사는 1946년 10월 헤이룽장성의 성도인 하얼빈으로 이사와 남의 빨래와 삯바느질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의 삶은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1957년 7월 중국 정부가 교황청과 독립적으로 중국 천주교 애국회(Patriotic Association of Chines Catholics)를 설립하고 이듬해 사도좌의 승인없이 26명의 주교를 선출함으로써 중국 교회는 깊은 질곡의 길을 걷게 된다. 안 여사는 애국회가 걷는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당시 하얼빈교구장 대리로 사목하던 김선영 신부와 함께 애국회를 거부하다 여러 차례 협박과 회유를 당하기도 했다. 신자들이 애국회로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애국회 소유 성당문을 가로막고 미사드리러 오는 신자들을 쫓아내는가 하면 비 오는 날에는 먼저 성당을 찾아 성당 간판에 진흙칠을 하는 등 조상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지키려는 그의 싸움은 처절했다. 이 때문에 종교 행사를 방해한 사상범으로 체포돼 몇 번이나 투옥되기도 했다.
안 여사는 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낮은 것을 안타까워해 1958년 1월 5일 하얼빈역 앞 광장과 도리공안분국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안중근 만세’를 불렀다. 당시는 한국이 중국의 적대국이었던 데다 공공장소에서 적성국의 국기를 흔드는 것이 반혁명적 행위로 취급되던 때여서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로 체포돼 도리공안분국으로 끌려가 현행반혁명죄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감옥을 드나들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옥에 갇힌 김선영 신부와 임복만 신부의 옥바라지를 자청하는 등 눈물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의 사상이 굳음을 안 정부는 급기야 1972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를 다시 척박한 땅 내몽골에 위치한 ‘노동개조농장’인 진래로개농장으로 보내 강제노동을 하게 했다. 갖은 폭력과 탄압을 이겨낸 안 여사는 그 곳에서 26년을 더 보낸 1998년 9월에야 여든여섯의 나이로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신앙인 안 루시아는 신자들의 도움으로 100년 가까이 지탱해준 늙은 몸을 누일 방 한 칸을 겨우 마련해 남편과 시숙 안중근 의사가 기다리는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안중근의 가계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고통스런 삶을 살면서도 신앙의 지키고 그로 인해 박해를 받았다. 이들의 삶은 탄압받고 찢겨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들을 하나로 엮어준 것은 안중근이 믿던 천주교 신앙이었고, 안중근이 지니고 있던 민족애였다. 우리에게 안중근과 그 집안이 있었음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교회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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