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오후 6시12분, 김수환 추기경 선종 직후 병실에서는 ‘운명 후에 바치는 기도’와 연도에 이어 사망미사가 봉헌됐다. 유족들도 미처 도착하지 못한 시각, 송광섭 신부(삼성산 성령수녀회 지도)는 김 추기경 선종 후 봉헌된 이 첫 미사를 주례했다.
송 신부는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자, 당시 교구장서리였던 윤공희 대주교와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간 자리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이후 각 본당 주임을 거치며 특히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으로 재직하며 만난 김 추기경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송 신부는 자신의 뇌리 속에 기억된 김 추기경에 대해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와 민족에게 보내주신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 신뢰하게 만드시는 분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 당일, 추기경님이 눈을 감으신 직후 병실에 도착했다. 가까이 다가가 잡은 손은 여전히 따스했다.
“퇴원 하시면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며 병실을 나선 때가 며칠 전이었는데, 아쉬움과 그리움에 가슴이 저렸다.
김 추기경님을 처음 마주한 것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신 때 인사를 드리면서였다. 이후 개인적인 존경을 품게 되는 일화를 수없이 마주하게 됐다.
내가 주임으로 처음 발령받은 곳은 파주 법원리본당이었다. 열정에 차 본당사목을 시작했는데, 뜬금없이 군종신부로 나가게 됐다. 당시 대부분의 신부들이 내심 기피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군종 파견이었다. 난 군복무도 정상적으로 마쳤고, 파견 대상에서 8번째 순번에 있어 설마 내가 군종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내 앞 순번의 신부들이 대상에서 제외되고 나에게 운명의 순간이 왔다. ‘군대를 또 가야 하다니!’ 순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거듭됐다. 게다가 신체검사 결과에 의해 나는 훈련 중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군종을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 내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윗분들은 내가 거절할까봐 노심초사하는 상황이었다. 8번째까지 순번이 밀린 상태에서 또 다른 대상자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고심하던 나는 사무처장 신부님께 “데오그라씨아스”라고 한마디 대답을 하고 돌아왔다. 군종으로 가기로 결정한 그때 추기경님은 로마 주교회의에 가서 자리를 비웠었다.
이후 교구청에서 만난 추기경님은 내 손을 잡으시더니 “고맙네, 송 신부. 어려운 결정을 해줘서. 내가 법원리를 한 번 갈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저 인사치레로 하시는 말씀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진짜 추기경님이 그 시골에 위치한 본당을 방문하셨다.
‘아, 이분은 빈말은 안하시는 분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며 추기경님의 말씀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됐다.
◎ 명확한 상황 판단력
1985~90년 나는 사목국장으로 재직했다. 그 기간 중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해야 할 일이 끝도 보이지 않았다. 매주 준비회의가 있었는데 항상 추기경님이 직접 주관하셨다. 그런데 이분, 회의 진행하는 것을 보면 절대 말을 실수하지도 않고 마지막에 정리하는 것도 너무나 명료했다.
‘아, 이분은 머리도 매우 명석한 분이시구나’하는 생각이 각인된 것은 그때로 기억한다.
김 추기경님이 외국어를 잘 하시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나도 사목국장으로서 옆에서 내외빈들을 맞으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외국어에 능통하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했다.
한 번은 서독 리프케 대통령이 방한했는데, 명동에서 추기경님과 만남을 가졌다. 그때 추기경님은 대통령께 “나는 왼쪽 귀가 잘 안들리고, 오른쪽 귀가 잘 들리니 제 오른쪽에 앉아주시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 나는 오른쪽 귀가 안들리고 왼쪽 귀가 잘 들리니 너무 잘 되었네요”라고 응답하셨단다. 이후 두 분은 무슨 말씀인지 독일어로 재미나게 한참을 이야기하셨다.
또 어느 날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이 세계 총장으로 임명되어 출국하기 전, 환송미사를 추기경님이 주례하셨다. 그런데 메모지 한 장 없이 추기경님은 강론 내내 그 많은 외국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배꼽이 빠져라 웃기시는 것이 아닌가. 옆에 서 있던 나는 ‘정말 어학에는 남다른 소질을 타고 나셨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가끔 김 추기경님은 개인 위성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떠올려 봤다. 어떤 일이든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보시듯 상황 파악이 명확하셨기 때문이다.
◎ 꾸밈없고 소박하신 분
내가 사목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교구청에서는 전 직원들이 나서 한 달에 한번 대청소를 했었다. 그때면 추기경님은 국내에 계시는 한 꼭 빗자루를 들고 교구청 구석구석을 쓸며 청소에 참여하셨다. 도리어 교구청 신부들이 각종 일을 핑계 삼아 청소에 빠지곤 했다. 추기경님은 청소에 참여하는 것에 전혀 꾸밈이 없으셨고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행동하셨다. 어느 날은 청소 시간에 교구청을 찾은 한 신자분이 그 모습을 보시고는 “아니 추기경님도 청소를 하시냐”며 놀라 돌아간 일이 있었다. 우린 평소에 늘 보던 모습이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신자가 놀라는 것을 보고 새삼 그러한 모습이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를 깨닫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추기경님께서 식사 도중 “내 차도 티코로 바꾸면 안 될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추기경님의 관용차는 현대의 스텔라 차종이었다. 그때 나는 대뜸 “사목방문을 다니려면 추기경님과 관리국장, 교육국장, 사목국장이 동행하는데 어떻게 다 티코를 탑니까?”라고 했더니 “사목방문 때문에 어렵겠구나”하시면 한숨을 쉬셨다.
◎ 늘 타인 입장에서 배려
사실 가끔 만나는 경우는 모르지만, 삼시 세끼 밥을 같이 먹고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아무리 윗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래저래 약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또 아무리 신중히 일처리를 해도 각각의 업무와 관련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이나, 뒤에서 헐뜯는 이들도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김 추기경님은 신설 성당 부지를 사는데는 한 번도 반대하지 않으셨으나, 가톨릭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킬 당시 혜화동에 캠퍼스를 유치하자는 의견에는 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교구 입장에서는 너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일로 추기경님은 독재자라느니 뭐니 욕을 들으셨지만 교구 행정의 균형을 잃지 않으시려고 무던히도 애쓰셨다. 김 추기경님은 인간적으로 너무나 힘겨운 상황을 많이 겪으셨고, 교황청에 보낼 사표도 몇 번 쓴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는 김 추기경님이 그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김 추기경님이 교구장으로 계시던 기간 중에 삼성산 성령수녀회의 설립을 허락해주셨다. 서울대교구 내에서 방인수도회 설립이 허락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추기경님께서는 매우 신중히 고민하셨고, 이후 수도회가 서울 홍은동 연립주택에서 수련 미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각종 미사와 행사에 기꺼이 동참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전해주셨다.
특히 수녀회 첫 서원식에서 하신 말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말씀이다.
“요즘 수녀님들 거울 자주 보시나요?”
추기경님의 이 질문만으로도 그 자리에 있던 수녀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터트렸다.
“수녀님들은 특히 자주 거울을 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거울을, 영혼의 거울을 늘 들여다보세요.”
이 말은 성녀 클라라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 강론을 들을 때 옆에 계시던 작은형제회 당시 관구장이었던 류수일 신부님이 자신도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며 전해주신 말씀이셨다. ‘참, 추기경님은 별걸 다 아시는구나’하는 생각도 설핏 지나갔다.
내가 돈암동본당 주임 시절, 그곳으로 사목방문을 오셨을 때 강론 후에 한 신자가 뜬금없이 “추기경님, 어떻게 해야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추기경님은 싱긋이 웃으시더니 “사실 내 신앙도 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추기경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곤 추기경님은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요” 등의 말씀을 덧붙이신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함께 추기경님을 따라 본당 사목방문을 다니다 보면 신자들 중에서는 나한테 “강론 잘하는 순서대로 교황님을 뽑는다면, 우리 김추기경님이 바로 교황님이 되실거라니까요”라는 말을 전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추기경님의 가장 따스한 모습은 매일같이 따라다니는 기자들 몰래 빈민가를 다니며 미사를 봉헌하시던 모습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입장을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신 결과였다. 내가 사목국장으로서 마지막 사목방문을 다녀온 후 기뻐하는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시던 그 분.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혼자 지고 계셨지만, 늘 온화하게 웃으시던 그분을 오늘 다시 떠올려본다. 정말 백만불짜리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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