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창간된 가톨릭신문의 시작은 ‘천주교회보’다.
‘82년’의 장구한 세월과 함께 가톨릭을 통해, 가톨릭에 의해, 가톨릭에 대해 기쁜 소식을 전했다. 교회사의 맥을 잇는 역사적 장면 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시절, 소박하게 살아가던 교우들의 모습과도 함께 했다.
오래 전, 그때 그 시절의 소박하고 즐거운 장면을 꺼내어 오늘을 본다. 과거는 현재를 말하고 현재는 미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안 켜켜이 자리한 어제, 오늘, 내일의 큰 의미를 찾았다.
1929년 성탄과 2008년 성탄
1929년의 성탄을 보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 ‘성탄’의 모습이다. 배우 중 몇 명은 한복을 그대로 입은 채다.
이 기사에는 사진말이 붙어 있는데 당시 성탄의 분위기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사진말에는 “대구본당주최성탄축하성극에 출연하였든 배역일동, 전열 우 아벨, 좌 가인, 이열 우로 아담, 마귀, 에와, 성모와 요셉, 후열 사상(死像), 삼왕, 천신”이라고 적혀 있다.
아래 사진은 지난해 2008년의 성탄 모습이다. 서울시립 소년의 집 어린이들이 성탄예술제를 하고 있다. 세월만 흘렀을 뿐 성탄을 기뻐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같다.
1932년 견진성사와 2009년 견진성사
1932년 ‘21’명의 아이들이 견진성사를 봉헌했다. 당시는 본당 ‘견진성사’에도 큰 비중을 두어 보도를 하였는데 모두 단체사진이다. ‘진주읍본당소년소녀견진성사 바든 긔념’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에는 짧은 기사도 함께 소개됐다.
기사는 “진주본당 소년소녀들 21명은 지난 11월 8일에 한꺼번에 안주교 각하께 견진성사를 바다서 나히는 적고 몸은 어리나 령혼은 튼튼한 ‘대장부’들이 되엿더라”라고 말한다. 소년들은 당시 교복을, 소녀들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미사보와 화관을 썼다.
현재 사진은 지난 2월 28일, 용인대리구 초등부 견진성사의 모습이다. 대리구 초등부 견진성사라는 이유가 아닐지라도 ‘385’명의 아이들이 견진성사를 봉헌했다. 기사 서두에는 “초등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애어른’이 됐다”는 말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견진성사를 바라보는 기자의 같은 시각을 전하고 있다.
1931년 축하식과 2008년 축하식
약간의 ‘술’은 축하식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다. 1931년의 축하식 자리를 보자. ‘대구서 개최된 전라도대리감목교구 설정 축하회 광경’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당시의 흥겨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복과 양복을 차려입은 모든 사람들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있으며 손을 높이 들어 건배를 외치고 있다.
2008년의 축하식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러 단의 높은 케이크를 자르고, ‘맥주’보다는 ‘와인’으로 건배 제의를 하는 것뿐이다. ‘축하와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의 건배는 여전히 같다.
1931년 단체사진과 2008년 단체사진
‘평안북도 중강진본당 교우일동’의 단체사진이다. 한국 전쟁 이전의 사진으로 정겨운 우리 신자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사진에는 짧게 ‘중앙은 길신부, 좌는 양회장’이라고 되어 있다.
대다수의 모든 본당 신자들이 한복을 입었고 망건을 쓴 남성들과 함께 여성들은 천 미사보를 썼다. 당시 평안북도 쪽에도 교세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앞에서 올망졸망 쭈그려 앉은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1932년 소년군과 2007년 스카우트
북과 나팔을 든 소년들이 있다. 1932년 소년대의 모습이다. ‘창립된 평양 카톨릭 소년군’이라는 제목의 사진기사에는 당시 주교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한국 천주교에 스카우트가 들어온 것은 1958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전에는 늠름한 소년대가 있었다는 사실.
2007년 인천 가톨릭 스카우트 1,2지구 연합회 창립식 모습이다. 아이들의 표정과 행동은 아이들처럼 자유분방하다. ‘브이’자를 그리며 환호하는 아이들 사이에 그때 그 시절처럼 교구장 주교도 함께하며 환하게 웃는다.
1931년 결혼과 2005년 결혼
‘최·정 양가의 경사’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본당 회장의 자녀들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싣고 있다. 당시에는 신자들의 혼례기사도 싣곤 했었는데 신부는 한복과 미사보와 화관을, 신랑은 양복을 입었다. 신랑과 신부의 배경 또한 자세히 실었다.
현재 가톨릭신문은 좀 더 다른 의미의 결혼 기사를 싣는다. ‘25주년’의 의미를 특별하게 하기 위해 교회가 열어주는 은혼 축하식의 기사를 다룬다. 미사보와 한복을 입은 신부와 양복을 입은 신랑의 모습도 예전과 흡사하다. 사랑을 하는 이들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으로 아름답다.
가톨릭신문의 ‘즐거운 그때 그 기사’
즐거운 기사다.
촌스럽고 어색하기도 하지만 꺼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때 그 시절, 가톨릭신문은 교리상식과 보도기사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이러한 재미도 전했다.
◎…“자아, 어떻습니까! 신부, 수녀님들의 신명도 이쯤 되야 사귈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울한 성인이 되지 않으려고’ 신부님 입씸과 수녀님 치맛자락에 신바람이 납니다.”
‘한 하늘 아래’란 제목으로 외국 가톨릭의 모습을 전했던 연재물이다. 사진도 재미있지만 사진을 풀어낸 기자의 시각이 더욱 즐겁다. 당시 시각을 참고 바란다.
“이 거치장한 고깔을 쓰고도 날씬한 수녀님은 ‘바오로 원선시오회’ 수녀님입니다. ‘시카고’의 원선시오 수녀님들은 4백명이나 되는 흰둥이 검둥이 누런둥이 각색 아이들을 양육하며 교육하는 보육원을 경영합니다. 여기의 ‘수녀엄마’ ‘수녀 아주머니’들은 신공하며 교육하며 또 같이 놀아주기에 얼마나 바쁜지. 한 하늘 아래 한 형제들이 한 그리스도 안에 한 그리스도와 같이 놀고 같이 먹고 같이 사니 절로 신명이 날밖엔.”(1960년 3월 27일자)
◎…여성 신자들의 단정한 옷차림을 계몽하는 기사도 있다. 모오드 ‘가톨릭 부인지’에서 따온 이 기사는 해석한 내용을 보며 웃음 짓게 한다.
“의상의 유행 특히 부인복의 그것이 가톨릭 잡지와 신문에 나타나게 된 것은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전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부인복에 관한 말씀을 가끔 하시고 정갈한 옷차림을 높이 평가하였다.”
기자는 이후 독자들에게 여성복에 대한 판단을 맡긴다. 그 말투와 생각이 참으로 재미있다.
“의상의 ‘데자인’은 벌써 상업적 ‘데자이너’에게만 맡겨질 수 없는 하나의 신체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정갈한 옷차림이 되겠는가?”(1960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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