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첩을 펼쳐보면 많은 추억이 담겨있다.
‘사진 속 꼬마는 어떻게 컸을까?’ ‘저 친구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등 궁금증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창간 82주년을 맞은 가톨릭신문은 교회 소식 외에도 따뜻하게 혹은 아픔에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다양한 신자들의 이야기들도 담아왔다. 문득 그들의 현재 모습이 궁금해졌다.
가톨릭신문의 인터뷰이들을 찾아 다시 한 번 기자들이 나섰다. 보도 이후 인터뷰이의 소식을 들어보자.
■ 본지 도움으로 병마 극복하고 새 삶 찾은 이희연씨
난치병과 힘겹게 싸우던 소녀가 꿈 많은 숙녀로 성장했다.
가톨릭신문 1997년 4월 6일 보도된 이희연(미카엘라·24·춘천 옥천동본당)씨가 ‘다시 찾은 가톨릭신문 인터뷰이(interviewee)’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당시 기사만 들고 강원도 강릉으로 향했다. ‘사진 속의 소녀가 어떻게 컸을까?’ 궁금해 하고 있던 찰나 이씨가 나타났다.
“제가 조금 늦었죠. 죄송해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은 긴 생머리에 짧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 예쁜 여대생이었다.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캠퍼스 산업공예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희연양은 졸업작품과 어학연수를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바쁘게 지낸다고 말했다. 처음 만나는 기자와도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병마와 싸우던 어린 시절의 아픔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12년 전, 이씨는 골육종이 발병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었다. 3000만 원이 넘는 수술비와 치료비 등 어린 딸을 위해 급작스럽게 큰돈을 마련해야 했던 희연양의 부모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당시 다니고 있던 원주교구 도계본당의 주임신부와 신자들이 치료비 모금에 앞장섰고 희연양의 소식이 가톨릭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가톨릭신문을 통해 도와주신 은인들에게 정말로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그분들 때문에 제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후 3개월에 한 번씩 서울 공릉동 원자력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는 11살의 소녀가 견디기에는 고통이 컸지만 병마와 싸우며 일찍 철이 들었던 희연양은 그 고통도 잘 버텨냈다.
지금까지도 일 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고 있지만 그것도 올해까지만 하면 된다고 했다. 덕분에 재수술도 하지 않았고 평생 보조기를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을 덜었다. 수술을 해도 다리를 절게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전혀 절지도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운동회 때마다 계주선수로 뛸 만큼 달리기도 잘할 수 있게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희연양은 어머니 공성순(안나)씨와 동생 이희진(도미니카)양과 함께 강릉으로 이사했다. 두 딸이 더 큰 도시에서 공부하기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동선(베드로)씨는 직장문제로 여전히 삼척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투병 당시에도 어른스럽게 “엄마와 아버지에게 큰 짐이 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희연양은 여전히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강릉집에 오시는데 많이 늙으셨더라고요. 부모님께 잘 해야 하는데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아요. 애교도 없고 집에서는 조용하거든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모시고 살겠다고 했는데 엄마, 아빠가 싫어하던데요.”
영어를 좋아한다는 졸업반 희연양은 여느 대학생들처럼 진로와 취업 걱정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걱정만큼이나 꿈도 많다.
“틀에 박힌 회사가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전공도 살리고 좋아하는 영어도 가르치고 싶어서 투잡하려고요.”
그리고 꿈 하나 더.
“직장도 잡고 안정되면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처럼 봉사도 하고 또 저처럼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 신학생 때 조혈모세포 기증한 윤하용 신부, 사제품 받고 2차 기증
“조혈모세포 기증해도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네’ 한마디가 ‘생명’이 되는 일이지요.”
‘윤하용’. 이 이름 석자를 만난 건 지난 1996년 3월 17일자 가톨릭신문에서다.
수원가톨릭대학교 5학년생(인천교구 소속), 한 사제 지망자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약관의 백혈병 환자에게 자신의 조혈모세포(모든 혈액세포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세포)를 선뜻 기증했다는 기사였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고 있던 환자가 대학 입학식을 눈앞에 두고 쓰러졌다. 다행히 환자의 유전자형이 윤하용 신학생과 거의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는 검사결과가 나왔다.
당시 윤하용 신학생의 기증으로 이뤄진 수술은 타인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동종 이식으로는 국내에서 세번째 시도된 것이었다. 신문 속의 그는 병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골수 이식을 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로부터 꼭 13년이 지났다. 다시 찾은 ‘Interviwee’는 인천 원당동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이었다. 당시 신학생었던 그는 지난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제 조혈모세포가 쓰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기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윤하용 신부는 당시 자신 뿐 아니라 신학생들이 단체로 기증서약을 했고, ‘기증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었을 뿐이라고 덤덤히 말한다. 기자와의 이 인터뷰도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더욱 많은 이들에게 조혈모세포 이식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도움될 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고 한다.
“당시 조혈모세포 기증 코디네이터 말로는, 기증을 약속하고도 막상 수술 직전에 취소하는 기증자들이 있어 환자들의 실망과 상처가 크다더군요. 제가 할 수 있다면 몇번이고 할 마음이었습니다.”
윤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이후에도 2차 기증에 한 번 더 나섰다.
“보통 3년 정도 지나면 백혈병이 재발한다고 해요. 병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지원군이 필요하죠. 또 엉치뼈에 구멍을 뚫고 골수를 빼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성분 헌혈만 하면 되더라고요.”
1996년, 윤신부는 총 1200cc의 골수를 기증했다.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괜찮냐?”였다.
“물론 너무 괜찮았죠. 골수이식한 후에도 여전히 축구를 즐기고, 지금까지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생긴 변화라면 아픈 이들에 대해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기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조혈모세포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기증하는 것인지 설명하는데 적극 나서게 된 것이라고. 덕분에 1998년 인천신학교로 옮겨와서도 후배들에게 권유해 가톨릭의과대학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이 펼치는 조혈모세포 공여에 동참하도록 했다.
“‘골수’를 뇌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조혈모세포와 그 기증에 대해 모르더군요. 그래서 통닭을 먹을 때도 뼈를 들고 혈액세포를 만드는 ‘피 공장’에 대해 설명해주곤 했죠.”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기증을 또 하겠냐?’는 질문도 종종 한다. 그럴 때마다 윤신부의 대답은 항상 같다.
“내가 ‘네’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 결실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또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나요?”
이어 기증자가 겪는 잠깐의 번거로움이 환자 뿐 아니라 환자 가족들까지 살리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안타깝게도 윤신부는 4년여 전, 당뇨병 판정을 받아 다시 조혈모세포 기증은 할 수 없게 됐다.
“제가 건강할 때, 기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더욱 감사드릴 뿐입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장기기증에 나설 수 있도록 긍정적이고 올바른 의식을 확산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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