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잔 다르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써보려 해도 열자나 될까. 프랑스, 오를레앙, 잉그리드 버그만이 떠오르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했던 영화 잔 다르크에서도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하얀 말을 타고 달리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아름다움만이 내 머리에 입력되어 있다.
하기는 그 영화도 분명 잔 다르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광적으로 좋아했던 여배우를 보러갔을 테니까 그 배우의 모습만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나온 "잔 다르크" 를 보며 이 영화에서도 잉그리드 버그만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던 내 기대가 얼마나 우습게 무너지는가를 꽤나 긴 영화를 보며 느꼈다. 아마 이 영화를 추천해주신 임 세바스티안 신부님의 평소 영화에 대한 안목을 믿지 않았다면 1부도 보기 전에 내팽겨쳤으리라.
이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다. 그러나 놀라운 영화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아니지만 진짜 잔 다르크가 나오는 진짜 중세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영화이다. 요즘의 속도와 상상력으로 꾸며진 잔 다르크가 아니라 1천4백년대의 속도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했을 뿐인 조그만 소녀의 모습이 들어 있다.
기적도, 영웅도, 스펙터클한 전쟁 장면도, 쇼킹하고 자극적인 장면도 없다. 그러나 지지리도 재미없고 길고 느린 영화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관객을 영화 속에 빠져들게 하려는 게 아니라, 빠져 나오도록 하려는지도 모르겠다.
입을 헤벌리고 멍청히 무아의 경지로 빠져들게 하지 않으려고, 우리의 의식을 자꾸 일깨우고 있지 않은가. 무슨 깜짝쇼처럼 확 빠져들지만 나중에는 마치 청룡열차를 타고 내린 것처럼 허망해지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이 영화는 우리를 영화 속에서 빠져나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자기 통찰과 묵상을 하게 만든다. 나는 어느 틈에 이 재미없는 영화와 친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섯시간 반이나 되는 긴 시간을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의 공기를 쐬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과장이 없는 소품과 의상, 정확한 시간의 리포트는 잔 다르크를 신화적인 성녀가 아니라, 그 시대에 실존했고,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던 한 평범한 소녀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듯 잔 다르크도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그가 보여준 행적은 기적이 아니라 기도의 힘을 빈 인간의 용기였다.
또 어린 소녀지만 제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을 몸으로 보여주는 게 감동적인 것은 애국심을 넘어선 자존심 때문이었다. 당당함은 비겁함과 우유부단함, 비굴한 기회주의를 넘어서고 프랑스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애국심과 자존심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었고 용기를 준다.
부상을 당해 아파하는 장면이나 전투에 지쳐 식탁에서 잠에 떨어지는 장면은 잔다르크가 10대의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순간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영성체를 청하는 모습은 우리도 하느님 앞에 무릎꿇고 간구하고픈 마음이 우러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종교 영화인데도 설교적이거나 고리타분하지는 않다. 종교재판은 마녀사냥과 같다. 스펙터클한 장면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겐 「잔 다르크」에서의 전쟁장면은 동네 싸움 장면처럼 초라하다. 적진을 향하여 육성으로 선전포고를 하거나 화살에 편지를 날리는 장면은 우습기까지 했다.
내가 이 지루하고 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이라도 뭔가 충격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머리를 빡빡 깎인 잔 다르크에게 "이단자 배교자 우상숭배자" 라는 죄명을 쓴 종이 두건을 씌워 화형대로 끌고 가는 장면에서는 전율이 느껴졌다.
그러나 긴 영화에 비해서는 화형장면은 너무 짧았다. 멀리 십자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연기 속으로 사라질 뿐.
그러나 그 순간이 짧았기에 화면이 다 사라질 때까지도 끄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잔 다르크의 마지막 모습에서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고 눈물이 맺혀온 것은 이 메마른 시대에 은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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