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즈가 9,9∼10 (보아라, 네 임금이 겸비한 모습으로 너를 찾아 오신다)
제2독서 로마 8,9.11∼13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여러분은 삽니다)
복 음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높으시고 지존하신 분이었지만 인간에 대한 그분의 깊은 사랑으로 세상의 저 밑바닥에까지 내려가시는 굴욕과 천시를 받는 하느님이시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였으며 바로 이와 같은 겸비의 자세야말로 하느님을 진실로 만날 수 있는 인간의 길이 기도 합니다.
성서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데 그들 모두는 스스로 잘나고 똑똑하고 뽐내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백이면 백 사람 모두가 자신을 낮춰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순명할 수 있는 겸손 하고도 겸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로 인해서 그가 더 낮춰질 수만 있다면 하느님은 그 죄인을 어떤 인생보다도 더 기뻐하십니다.
오늘 1독서는 장차 오실 위대한 임금이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가 천상 군마를 타고 세상의 큰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리라고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고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못 배우고 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으며 그 자체로 죄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통적인 고정 관념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낮은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이자 호소입니다. 낮은 자리는 진정 하느님의 처소요 그분이 스스로 머무셨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낮은 자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위대한 자리입니다. 바오로도 일찍이 주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남을 체험했으며(Ⅱ고린12,7∼10참조), 베드로도 여러 번 실패하고 나서야 주님께 더 매달리고 굽힐 수 있는 위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이 낮아질 수 있을 때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제가 한창 교만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죄를 져서 한 사건에 깊이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꼼짝없이 저는 제가 판 구덩이 속을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런 기도를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 저를 치십시오. 제가 가루가 되어 부서질 때까지 치십시오.' 저는 날마다 그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곤란한 처지에서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었으며 매일 읽는 성서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서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어떤 큰 힘이 저를 온통 꽉 채워 주는 은혜의 충만함을 그때 비로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잘 풀렸으며 좋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낮은 자가 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하고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낮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부수고 깨뜨려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눈이 떠지며 은혜의 길이 새롭게 열립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신앙을 위해서 하느님께 몸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만을 실 천하기 위해서 진리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직접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찾고 갈구했던 하느님께서 직접 찾아 주셨건만 그들은 이 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만이 똑똑하고 잘 났다는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거짓 신앙을 용기있게 깨뜨려야 합니다.
많은 본당에서 문제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소위 열심하고 똑 똑한 자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들입니다. 교리나 성서를 남보다 더 알고 그리고 봉사도 더 많이 하는 자들이 오히려 사람을 더 무시하고 배척하며 용서를 안 합니다. 그리고 자기 그룹의 어떤 세력을 형성해서는 자기들끼리만의 이질적인 분위기를 고수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상대의 말이 들어가질 않으며 하느님의 진리도 자신들이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합리화시킵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낮은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권력이 하늘 높이 올랐다 해도 저 밑바닥으로까지 내려가는 겸손과 순수함이 없다면 그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평생을 믿고 걸어도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내려갑시다. 예수님께서 내려가셨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그것이 진정 올라가는 길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만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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