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스턴 대학에서 수 년간 영문으로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을 학교에 제출하고 나서 미국인 친구에게 편지를 쓰던 중의 일이다. 문득 오렌지라는 단어의 철자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닌가! 얼른 사제관 안내실로 전화를 걸어서 자매님께 철자를 여쭈었더니, 『아이구 우리 박사님께서 오렌지의 철자도 모르시는구료』하시면서 ORANGE라고 또박또박 불러주셨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깨달음에 감사를 느꼈다. 박사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는 것을 즉시 질문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그리고 즉시 질문하려면 자만심을 극복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겸손도 필요함을 실감했다. 사실 질문할 능력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수 있는 겸손의 덕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하느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학식이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는 배우려 하지만,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와 비슷하게 권력자나 부자가 높은 자리에 앉고 평민들은 낮은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셨으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해 주신다. 예수님은 이 평범한 진리를 황금률로 표현하기도 한다. 『네가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바 그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 말씀을 분석해보면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A) 그 바라는 바를 남에게 해주는 것(B)을 동등하게 여기라는 말이기도 하다. 즉 나의 바람과 남의 바람을 동일시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나와 남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죄에 물든 우리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에 남보다 내가 더 중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남보다 윗자리에 앉고 싶고, 남을 인정해 주기에 앞서 내가 인정받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잔치 집의 손님들은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누구든지 윗자리에 가고 싶지만 그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만일 내가 윗자리에 앉는다면 다른 사람을 아랫자리로 몰아내는 셈이다. 그러므로 윗자리에 앉는 사람은 예수께서 제일 중대한 계명으로 가르치신 『네가 남에게서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황금률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만일에 황금률을 지킬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윗자리를 남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왜 나만 황금률에 지켜야 하는가?』『상대방도 황금률에 따라서 나에게 윗자리를 양보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윗자리를 양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장 11절)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자이며 황금률을 어기는 사람이다. 그는 현세적이며 눈앞의 이익에만 눈먼 소경이다. 그러나 현명한 신앙인은 당장에는 손해인듯해도 남을 먼저 높이면 결국 나도 높아진다는 것(사랑)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결국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황금(사랑) 법칙은 겸손함을 뜻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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