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나의 미래를 확고히 결정하지 못하고 대입 재수생이던 시절 성당에서 만난 어느 자매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분의 언니 주선으로 어린이 대공원에서 세시간 정도의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말을 많이 했는데 도무지 그 자매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목이 말라 그 당시에 시판되던 써니텐이라는 음료수를 서너병 정도 마신 일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정신없이 집에 돌아와 숨을 돌려보니 그저 멍하기만 했고 나에게 분명해진 것은 누군가를「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나고 좋은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 자매님을 만난 것에 대해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했고 후회없이 그분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여러해를 넘기면서까지 번민했다. 나의 고민거리는 참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도무지 확신할 길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국 순교자 대축일의 복음생각을 하면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께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고 이제 사형장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분들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도무지 상상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문과 굶주림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포기함, 혹시나 당신 때문에 친구들이 피해를 당할까 염려하는 마음, 그리고 불신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 등도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순교자들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던 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순교자들의 아픔과 고통이 심했던 그 이상으로 그 분들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 강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기계로 재어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인해 당하는 불이익이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에 따라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가 시험과 도전을 받는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도전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달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출발한 것이다.
순교는 현세적인 계산으로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자신의 생명이 박해자에 의해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와 믿음의 행위이다. 그리고 순교자는 이 자유로운 선택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자유인이란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선택을 강요하는 위기상황에서도 참된 것을 선택하는 주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참된 것을 자유로이 선택하는 주체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서 선택을 당해주는 기회주의자인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눈앞에 보이는 잠시의 불이익 때문에 이웃과 공동체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된 사회는 한마디로 불신의 사회, 즉 죽은 공동체이다.
순교자가, 순교의 정신이 있는 사회만이 신뢰와 믿음으로 건강한 생명이 움트는 공동체일 수 있다. 작금의 한국사회가 총체적인 불신으로 치받는 것은 우리 모두가 순교 선열들이 물려준 참신앙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우리 모두가 애타게 기원하는 것은 참사랑, 즉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마저도 내어주는 용기와 기백이 있는 참자유인, 참사랑이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9장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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