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내 이름 앞에는 한국교회 최고령 사제란 명칭이 따라 붙게 됐다. 돌이켜 보면 이 최고령 사제란 명칭이 주는 무게만큼이나 내 사제 생활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견뎌내야 했다. 그 세월 중 50년은 이남에서 지냈고 20년은 북쪽에서 보냈는데 15년은 왜정시대였고, 나머지 5년은 공산당 정권하였다.
내 나이 올해로 95세. 사제품을 받은 지도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미 그 때 그 동료 사제들과 신자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모든 기쁨과 고난이 생생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가끔씩 들춰보는 누런 앨범에는 나의 이러한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요즘 젊은 사제들이나 신자들이 어떻게 일제 치하 때와 6?5 전쟁 당시 우리 교회 사제들과 신자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나 책을 통해 읽은 것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제로서의 삶을 지키려 애썼던 나로서는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상세히 정리돼 있다.
가슴에 묻어둔 일화 소개
처음 신문사로부터 노사제 회고 제의를 받고 바로 일제 시대와 6·25 때 겪었던 일화를 중심으로 내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일화들을 하나씩 소개하다보면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볼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혹 사제의 꿈을 키우고 있을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1907년 2월 17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에서 아버지 임영익(루도비꼬)과 어머니 김숙일(엘리사벳)의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부모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의 영향으로 나는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릴적 기억이라고는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부모님은 두분 모두 신앙생활에 열심하셔서 어릴적부터 엄하게 신앙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착실히 교리를 배우던 나는 열 살 되던 해 내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을 맞게 된다. 1917년 어느날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고는 『누가 너에게 신학교 들어가고 싶냐?』고 물으면 신학교에 꼭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라고 당부했다. 또 아버지께서는 『왜 들어올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들어가려 합니다』고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10살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얘기하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서울 용산 소신학교에 왔다. 바로 소신학교 입학 자격을 위한 예비시험이 있었던 것이다. 시험관을 담당했던 신부님께서는 아버지가 나에게 주지시켰던 질문을 던졌고, 나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서울 용산 신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일찌감치 나를 사제로 만드시겠다고 결심하시고 차근차근 그 준비를 했던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렇게 해서 나는 사제로 나아가는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어머니와의 이별 큰아픔
처음 소신학교에 들어가 보니 동료들의 나이가 나보다 2~3살은 위였다. 이 때 동창이 지금은 작고한 노기남 대주교 등이다. 소신학교 입학하고 제일 서럽고 힘들었던 점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참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재롱을 부려야 할 나이에 특히 어머님과의 이별은 나에게 큰 아픔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통제 받는 생활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혹시 친구들이 볼까봐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서 펑펑 울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그러고 나면 얼마동안은 부모님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당시 소신학교 학칙은 매우 엄격했다. 침실 규칙은 절대 침묵이요, 말 한마디만 해도 큰 벌을 받았다. 혹시 잘못한 학생이 있으면 학생들과 신부님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사실 밥그릇만 갖다 놓았지 대개는 먹지 않았다. 그런데 비위 좋은 학생은 밥 한 그릇을 다 먹기도 했다. 이런 벌을 3번만 받으면 퇴학을 당했다.
학생들의 반찬은 김치와 고추장이 전부였다. 세계 1차 대전 때문에 나라 경제가 어려워 저녁에는 죽을 쑤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주일과 목요일 점심에는 고기국을 주었으며, 각 신부님들의 본명 축일에도 고기국과 과자 한 봉지씩이 주어졌다. 그래서 우리 소신학교 학생들은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또한 삼왕래조(주님 공현) 날에는 주교님 이하 근 20명의 신부님들이 모여 잔치중에 왕을 뽑는데 왕이 된 신부는 부활 후 첫 목요일에 서울 동작동 별장으로 가서 단단히 한턱을 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상 이 잔치는 집에서 하지 않고, 산에 올라가서 하는데 우리 학생들도 빵, 과자, 초콜릿, 카스테라 등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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