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라는 말과 더불어 현대를 특징 짓는 말 중의 하나가 자유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말은 『00으로 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와 『00을 위한 자유』로 구별된다.
전자는 소극적인 의미로써 예를 들면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등 벗어남과 해방이라는 관점에 강조점을 두는 개념이다.
그러나 후자는 적극적인 의미로써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중점을 두는 개념이다. 아마도 더 성숙하고 본 의미의 자유의 개념은 후자 쪽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점은 자유라는 말의 한자어를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자유(自由)라는 말은 「스스로」를 의미하는 말과 「머무른다」를 의미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自律(자율)이라는 말도 스스로의 계율과 법이라는 의미로 이 두 가지 말 모두 스스로 묶는 것, 자신을 다스리는 의미가 강한 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유는 결코 방종과 혼동될 수 없는 개념이 되는 것이고, 죄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오늘 우리가 같이 묵상해 보고 싶은 부분은 앞의 두 비유, 잃었던 양과 은전의 비유이다.
이 두 가지 비유는 우리가 일상사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부분으로 어느 면에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는 비유이다.
왜냐하면 양 백마리를 가진 사람이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를 들판에 그대로 둔다. 이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으로 항상 맹수와 강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 마리 때문에 오히려 아흔 아홉마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당시 양 백 마리를 가졌다면 상당한 부자이기에 오히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미련을 끊고 아흔 아홉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현명하고 이익이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 은전 한 닢은 미화 약 18 센트 정도로 우리 나라 돈으로 약 200~300원 전후의 아주 작은 돈이다. 그 돈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샅샅이 뒤지는 것. 막말로 기름 값이 더 들 수도 있고, 수고와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목자와 여인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한다. 그것은 이익보다는 길 잃은 양에 대한 연민과 별로 큰 금액은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는 여인에게는 소중한 돈이었기 때문이다.
「연민」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이요, 이러한 마음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는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비유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적절한 예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그보다 더 소중한 것, 때로는 생명도 아니 온 세상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지만 사랑하기에 그러한 행동은 의미가 있다. 아마 이러한 면이 사랑의 맹목성이리라 !사랑이신 하느님, 우리를 아끼시고 소중히 여기시기에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고, 회개하는 우리를 반기시는 하느님, 이 분이 바로 오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이러하다면 이제 우리 삶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하고, 삶의 의욕과 의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경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도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삶이 변화된다면 하물며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시고, 당신 아들마저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바치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 삶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지 우리 죄를 책망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죄를 없애시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 하여 죄 값을 치르러 오신 분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삶은 필연적으로 죄인들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에 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의무감 때문도 심판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분에 대한 사랑의 응답인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에 사랑을 위한 자유로써 우리 스스로의 법을 만드는 것이다.
「죄인을 사랑하는 하느님」「죄를 자유와 사랑의 관점으로 해석함」 이 두 가지가 예수님 가르침의 독특성이 아닐까!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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