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 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순교자 축일을 지내는 오늘 저는 먼저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 역사상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2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한국교회는 우리 선조들 스스로의 힘으로 창립된 교회라는 점입니다. 세계 교회사를 보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신앙의 씨가 뿌려지고 그 바탕 위에 교회가 성장해 갔습니다만 우리 나라는 그 과정이 다릅니다. 어떠한 이방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을 통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가 뿌려졌고 성장해갔다는 것입니다. 19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인 이 승훈 베드로가 이 땅에 귀국하기 전에 이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신앙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50년 동안은 중국인 사제 두 명이 짧은 사목 활동을 했을 뿐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으로 신자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참으로 자랑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가성직 제도』입니다. 이는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를 허가권자의 허락 없이 임의로 집행했던 제도입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87년경까지 북경에 가서 직접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베드로)에 의해 교회 발전책으로 제시되어 채택된 제도로 이승훈 권일신 및 10여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을 받지 않은 채 사제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성사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무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또 다른 면으로는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열성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일뿐 아니라 우리 한국 천주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역사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분들 중 103명의 위대한 순교 성인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물론 신앙을 숫자로 따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일 수 있지만 이러한 성인의 숫자는 세계적으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많은 수입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베트남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성인을 우리가 모시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우리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과거의 영광만으로 살아 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자랑스런 역사와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자아부정과 십자가의 수락을 요구합니다(23절). 여기서 자아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종에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적인 이익을 버리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라는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르키든 추종자 자신의 십자가를 가리키든 박해 가운데 순교를 각오하라는 뜻입니다만, 루가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로 고쳐 씁니다. 이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나날이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명령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목숨을 버릴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4절).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장차 하늘에서 영생을 잃을 것이지만 에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미래인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는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원천으로 「자신」과 「현재」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재물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5절). 이 생명은 우리가 하느님께 의탁 할 때 보장받습니다. 이 세상의 재화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생명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상대화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실존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여기」에서 삶의 자세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긴다. 부끄럽다라는 말은 「떳떳하지 못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좌절과 실망」이라는 개념을 포함한말로 이해해야하는데 바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진다면 종말에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는 동태보상률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현재를 사는 사람일 수밖에 없고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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