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사학죄인으로 몰려 포청과 형조에서 갖은 악형을 겪어야 했고,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아 수많은 신자들이 참수되거나 교살·장살 당하기도 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교회사연구소와 한국순교자 현양위원회로부터 추천을 받아 그동안 한국 교회의 여러 순교사들 중 우리 교회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5대 순교사건을 선정, 소개한다.
▩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 정조 15년에 일어난 박해로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했다.
1791년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제사금지령에 따라 이해 8월 그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고, 권상연도 윤지충을 따라 신주를 불태웠다. 하지만 윤지충의 친척과 이웃들이 이들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이로 인해 11월 28일 권일신과 서학서를 들여온 이승훈이 체포되고 이어 서울에서 최필공을 비롯한 11명의 교우가, 충청도에서는 이존창, 최창주 등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잡혀갔다.
그 후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도중 사망했다. 그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박해를 계기로 많은 양반 계층이 천주교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신유박해(辛酉迫害)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그해 10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 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 박해로 그들 중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해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됐다.
박해는 지방으로도 확산돼 충청도의 이존창이 공주에서 참수된 것을 비롯해 여주 성문밖에서는 원경도 임희영 최창주 이중배 정종호 등이 순교했다. 특히 주문모 신부가 4월 19일 군문효수됐고, 주신부를 헌신적으로 돕던 강완숙도 처형당했다.
이처럼 가혹하게 자행됐던 신유박해로 인해 처형된 신자가 100여명, 유배된 자가 400여명으로 도합 500명선에 달했다.
신유박해로 한국교회는 천주교 전파에 대한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게 됐고,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헌종 5년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대박해이다. 박해는 3월 5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정식으로 시작됐다.
이로 인해 모방,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정하상, 유진길과 13세된 그의 아들 대철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 기해박해는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경기도와 수도에서 가장 큰 박해가 가해지고 순교자도 많이 배출했지만, 교우라면 박해를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규모였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10명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해박해는 천주교와 관계된 세력을 정치적으로 분쇄하려는 것이라기 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에도 1845년엔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입국했다.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년 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로 김대건 신부의 체포가 계기였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에게는 그해 9월 15일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또한 김신부의 뒤를 이어 끝까지 신앙을 지킨 현석문 등 남녀 교우는 그해 9월 20일 모두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때 순교한 사람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현석문 임치백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남경문 한이형 등 9명이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 9명의 순교사실을 「기해일기」에 첨가해 「기해·병오 순교자전」을 프랑스어로 편집하고 그것을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옮겨 로마에 보냄으로써, 로마에서는 이 문헌을 토대로 1857년 기해 및 병오박해의 순교자 중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 중 79명이 1925년 복자위에 올랐다가 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병인박해(丙寅迫害)
조선말기인 1866년 시작돼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됐던 박해이다. 피로 얼룩진 한국교회사 전체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 수에 있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때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브르트 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등 외국인 선교사들과 황석두 등도 각각 순교했다.
1866년 초부터 시작돼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박해는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됐다. 이기간 동안 조선교회는 근거를 잃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처형된 순교자만도 8000~2만 여명으로 추정되며, 그나마 살아남은 신자들은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로 자라난 조선교회는 186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되찾았으며,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했다.
▲ 200년 박해 200여 년 동안 한국 교회에는 크고 작은 박해가 계속됐고, 그 박해를 통해 수많은 유명무명의 순교자들이 전국 각처에서 속출했다. 사진은 전주교구 순교역사체험에서 신자들이 당시 박해의 실상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
1791년 신해박해
제사 없애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으로, 윤지충 권상연이 참수되고 권일신은 유배도중 사망했으며 이승훈은 배교, 양반 계층 교회와 멀어짐.
1801년 신유박해
정순왕후 박해령으로,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이존창 원경도 강완숙 주문모 신부 등 100여명 순교. 교회 지도급 인사 많이 잃어.
1839년 기해박해
사학토치령으로, 정하상 유진길 유대철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110명 순교. 정치적인 박해가 아니라 순수 신앙적인 박해.
1846년 병오박해
김대거 신부 체포 계기로, 김신부 현석문 임치백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남경문 한이형 등 9명 순교.
페레올 주교 「기해일기」에 첨가 훗날 82명 가경자로 선포.
1866년 병인박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따라,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황석두 등 8000~2만명 순교.
1873년까지 계속된 최대 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