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4가지 질문을 주고 언제 가장 불행한 기분이 드는지 조사해 보았다.
(1) 10년 전에 일어났던 유쾌하지 않은 경험과 학교나 직장 혹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당신이 어려웠다고 생각되는 일을 생각해 보라.
(2) 그때(10년 전) 경험했던 아주 유쾌하고 행복한 일을 생각해 보라.
(3) 현재 경험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을 생각해 보라.
(4) 현재 느끼고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을 생각해 보라.
이 질문에 대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기분에 빠진 것은 현재의 고통(3)이었고, 두번째 불행한 기분에 젖게 되는 결과는 의외로 과거에 행복한 일을 생각할 때(2)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기분을 느낄 때는 과거의 어려웠던 일과 불행했던 일을 생각해 낼 때(1)였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행복은 비교개념으로 이해된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행복이나 불행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불행이 현재의 행복이 되듯이 현재의 불행은 미래의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역으로 현재의 행복은 내일의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에 너무 현실적인 행복에만 관심을 집중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복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와 아주 불행한 처지에 놓은 거지 라자로가 있었는데 죽음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표현은 메시아께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열 때까지 의로운 영혼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기다리고 있던 처소)안기게 되고 부자는 땅에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는 악이요, 가난은 선이라든가 혹은 재물의 부정한 사용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정도로 알아듣는 것은 이 비유를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 물론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만)에 대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를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은 지상의 복과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님의 계명을 완수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은 생애 동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착한 이에게는 모든 것이 잘되어야 하며 악한 이에게는 모든 일이 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누가 고생한다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이 악하다는 증거이다. 현재의 부와 복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에 현재의 상태가 중요하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사고방식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보아라!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였던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하며 하느님이 축복한 사람으로 보이던 부자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상태가 영원한 것이 아니요, 물질적인 부와 가난을 가지고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다. 현실적인 부와 가난은 하느님의 축복과 불행을 재는 기준이 될 수도 없고,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는 소박한 진리가 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비유의 뜻은 예수님 시대에만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나의 삶이나 다른 이의 삶을 판단 할 때 재산의 유무로 판단하고 있고, 현재의 부와 가난을 가지고 하느님 축복의 유무를 묻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상을 하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비록 저 세상에 올라가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라자로의 생활보다는 부자의 생활을 더 염원하고 더 탐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무서운 하나의 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어쩌면 성서에 나오는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가 오늘날 부요한 나라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 해결의 실마리도 이 비유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허황된(?) 생각도 아울러 해보게 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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