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경관에게 『그럼 당신 여기 앉아 있어요. 나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어야겠다"고 말하고 고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밖에 기다리던 경찰이 갑자기 들어오더니 의자를 갖다 놓고 덥석 않는 것이 아닌가. 내가 왜 들어왔느냐고 묻자 그는 "당신은 믿지 못하겠고 내가 직접 교우들이 죄 고백하는 것을 들어야 되겠다"고 했다. 정말 난감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경관을 밖으로 쫓아낼 수 없는 처지라 자칫 하다간 신자들이 이 일로 다칠 것 같아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나는 경관이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모른다는 것을 감안해 한 방법을 찾아냈다.
지금은 교우 숫자가 많아 고해전 경문을 간단하게 외우든지 안 외워도 되지만 당시는 경문이 꽤 길었다. 그래서 나는 고해실에 들어온 교우를 보고 "당신 그 경문을 크게 외우시오"라고 시키면서 똑똑하고 찬찬히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는 교우는 내가 하라는 대로했다.
그때 방식대로 하면 "오 전능하신 천주와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와 성 미가엘 대천신과 성 요한 세자와…"로 시작하는 고죄경을 고해실에 들어온 교우가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고죄경을 다 외운 다음에 교우가 "그동안"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이란 말의 의미는 다음에 자신의 죄를 고하기 위한 시작이었다.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 "이 외에 나 성찰치 못한 죄"를 외우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이 외에 나 성찰치 못한 죄 남이 나로 인하여 범한 죄 있으니…" 그걸 외웠다. 그렇게 하고 나서 또 죄를 고하겠다고 "그동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시 "그럼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우시오"라고 하니까 "천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가 중죄인이오니 천주께 죄를 얻은지라 이제 내 지선하심을 위하여… 천주는 내 죄를 사하소서" 그러길래 나는 다른 사람들도 해야 되니 빨리 나가라고 하며 그 신자를 내보냈다. 그리고 다른 교우들도 계속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죄는 고하지 못하고 고죄경만 외우도록 조처했다.
사사건건 왜경과 부딪쳐
한편 함께 있던 경찰은 아무리 귀를 갖다대고 열심히 들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자 『신부상, 신자들이 죄를 고한 것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그들은 분명 죄를 고백했고, 나는 알아들었다』고 대답하자 경관은 『자신은 한 마디도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다면 신부상이 지금까지 교우들이 지은 죄를 다시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말할 테니 잘 들으라고 하고 『첫째는 공심재를 못지키고 대죄 소죄도 못지키고 성 미카엘 대첨례 참례도 궐하고 성 가브리엘 참례도 궐하고 성 아우구스티노 참례도 궐하고 ….』 경관은 이 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자 『신부상, 당신 말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나. 내가 말해도 당신이 못 알아들으면 날더러 어찌하란 말이냐? 나는 당신 하라는 대로 할테니 말해달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경관은 『그럼 앞으로 할 교우들도 모두 이처럼 고백하냐?』고 물었고 나는 『모두가 이런 방법으로 고백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관은 『흥』 코웃음을 치고는 일어서서 출입구를 열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위기를 모면한 나는 경관이 확실히 사라졌는지 확인한 후에 교우들에게 조금전에 고해성사 본 사람들 다시 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로도 사목활동을 하는데 있어 사사건건 일본 경관들과 부딪쳐야 했고, 나는 그 때마다 이런 우회적인 방법으로 고비를 넘겨나갔다. 하여간 일본은 천주교 예수교 다 제거하고 천황을 종교로 삼으려고 부단히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북한군, 무차별 살육 자행
산넘어 산이라 했던가.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무시무시한 왜정시대를 마감하고 나니 이번엔 6·25 전쟁이 발발하고 공산당들이 쳐들어 왔다. 그래도 일본군인들은 사제나 신자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지만, 공산당들은 죄없는 이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잔혹성을 보였다. 황해도에도 본당이 15개 있어서 사제가 15명이었는데 6·25가 터지고 그해 무려 10명의 사제가 목숨을 잃었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에 빠져 있었다.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던 중 그해 9월 말 마침내 전열을 재정비한 한국과 미국 군인들이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으로 넘어 오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날은 1950년 10월 20일께였다. 교우 청년 중 한 명이 『국군 환영회를 하니 오전 10시까지 면사무소 마당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기쁜 마음에 나도 거기에 참석했다. 거리는 국군을 환영하는 환영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장교들이 대략 50~60명이 됐고, 미군도 10여명 이렇게 와서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나는 군인들 틈 사이에 섞여 구경하고 있는데 군인 한사람이 어깨를 치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하자 그 군인은 대뜸 『당신이 천주교 신부』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군인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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