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군인을 따라 어느 건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계급이 높아 보이는 장교가 앉아 있었다. 나를 인도했던 그 군인이 『각하, 신부님을 모시고 왔습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각하라는 사람이 나에게 이남에서 왔는지 이북출신인지 묻는 것이었다. 내가 이 곡산읍의 본당 신부라고 대답하자 그는 『신부님들이라면 모두 죽었는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수 있었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열명의 사제가 공산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다섯 명이 남았는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국군이 들어와 극적으로 살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그 군인은 자기도 신자라고 밝히면서 세례명이 가브리엘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준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장군은 저녁에 찝차를 보낼테니 자기 숙소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저녁 정말 찝차 한대가 와서는 가브리엘 장군이 있는 숙소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렇게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군인 한 명이 긴급히 들어오더니 국군이 평양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장군은 모든 부대원들에게 술잔치를 하라고 하면서 이곳으로 술 한병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나와 장군도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평양 점령의 기쁨을 만끽했다.
나는 어느 정도 술잔이 돌고 나서 장군에게 『언제 완전한 평화가 오겠냐』고 물었다. 장군이 왜 그러냐고 질문해 나는 해마다 서울가서 피정도 하고 동창 신부들도 만나왔는데 최근 5년동안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고 좌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장군이 『그러면 내일 가는 것이 어떠냐. 군부대차가 내일 서울을 가는데 신부님도 타게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일 당장은 힘들다고 얘기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누이동생 때문이었다. 국군이 곡산을 점령하려고 일주일 가량 비행기로 폭격을 퍼부어 어머님이 머물고 계시던 집이 황폐화 됐다. 그래서 집안의 세간은 물론이고 당장 먹을 식량마저 없어 그래도 내가 있어야 된다고 장군에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이장군은 당장 백미 두가마와 잡곡 세가마해서 총 다섯가마를 성당으로 보낼테니 어머님 걱정말고 내게 내일 서울로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정말 이장군이 쌀과 잡곡을 보내고 내가 서울로 갈 수 있게 차를 보냈다. 나는 며칠 다녀온다고 별 문제 없을 것 같아 그냥 그 차를 얻어타고 서울로 왔다.
전쟁으로 어머니와 헤어져
서울 와서 며칠간 주교님도 만나고 여러 신부님들을 찾아다니며 그동안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다 보니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조금씩 어머님과 누이동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우들의 소식도 궁금했다. 하지만 서울서 황해도가 천리길인데 걸어갈 수는 없고 그렇다구 기차나 버스가 전쟁으로 끊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던 터에 동창신부이던 윤형중 신부가 내게 찾아와 『너 정말 안가길 잘했다』는 것이 아닌가. 오늘 아침 조간 신문에 중공군 백만 명이 지금 압록강 만주에서 신의주로 건너오려고 하고 있는데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서울에 있으니까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들이 서울로 왔는데 이북에 있던 사람들이 그때 다 올라왔다.
나는 참담한 마음 가눌길 없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과 누이동생 그리고 신자들은 어떻게 됐는지 피난은 왔는지 알 방법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처음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어 자신들만 몰래 부산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시민들의 안위는 상관하지 않고서. 이런 와중에 시민들 중 중요한 사람들은 거의 잡혀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간 정부를 원망하며 격분하기까지 했었다. 그 일을 한 번 당했던 정부는 중공군이 쳐들어 왔을 때는 서울에 있는 시민들에게 모조리 대구나 부산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사제들도 정부의 방침에 따라 피난을 갔는데 당시 서울교구 신부가 50~60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극적으로 만난 남동생
그렇게 부산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한 집을 세를 내 함께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윤빅토리노 신부가 합숙소로 나를 찾아왔다. 윤신부는 포로 수용소 군목 신부로 있는 기신부(미국인)의 보좌 신부였다.
윤신부는 『신부님 혹시 동생 이름이 임시릴로 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내 동생이 지금 미군 포로 수용소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만나보고 싶다고 하자 우선 기신부를 찾아가 상의해보라고 했다. 다음날 나는 즉시 갔다. 가면서도 내내 황해도에 있어야 할 우리 동생이 어떻게 수용소에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연인즉 이랬다. 공산당 정치하에 면사무소 서기를 하고 있던 동생을 북한군이 무슨 이유로 가뒀는데 천주교 믿는 것도 이유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여하튼 감옥생활을 하던 중에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면서 죄수들이 전부 자기 집으로 달아났고 우리 동생도 집으로 가던 도중 미군과 마주쳤고 그들이 여기 부산 포로수용소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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