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령 사제였던 임충신 신부님은 그 분의 바람대로 70년간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목자로 헌신하시다 지난 9월 18일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본지는 『이 난을 빌어 부족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후배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며 흔쾌히 응해주셨던 임신부님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신부님 선종 후에도 그동안 말씀해주셨던 얘기를 토대로 계속 연재해 왔습니다. 이제 연재를 마치며 다시 한번 고(故) 임충신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남동생 못 만나
나는 남동생을 만나려고 동생이 갇혀 있다는 수용소를 찾아가 미군 초병에게 당시 포로 수용소 군목 신부로 있던 기신부(미국인)의 면회를 신청했다. 나는 기신부를 만나서 여기온 목적을 얘기하고 동생을 좀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그는 수용소 규칙상 직접 면회는 힘들다고 설명해주었다. 이런 연유로 남동생을 지척에 두고도 참으로 가슴이 아팠지만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이후 남동생은 전쟁이 끝나고 53년이 되어서야 포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제주도로 피난
1951년 1월 어느날 노기남 대주교님이 우리가 기거하던 합숙소로 찾아와 『지금 전국이 어떻게 될지 예측불허 상황이라 걱정된다』면서 『만일의 경우 부산까지 북한에 넘어간다면 피난할 수도 없는 만큼 향후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젊은 인재들을 안전지대로 피신시켜야 하겠다』고 설명했다. 노 주교님께서 말씀하신 안전지대는 바로 제주도였다. 노 주교님은 그러면서 신부들 중에서도 젊은 신부들과 신학생들 또 젊은 수녀들을 선발해 제주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주교님은 내게도 함께 갈 것을 권유했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렇게 해서 나의 제주도 생활은 시작됐다. 우리 일행은 서귀포 성당에서 기거했다. 약 30평 남짓한 성당에는 사제관, 부속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사제관은 두 개의 사무실과 한 개의 마루방으로 돼 있었는데, 사무실 두 방은 다른 동료 신부가 사용하고 나는 마루방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식사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성당을 돌보아온 전교회장 집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곳 생활은 나에겐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간 있을 때마다 산책과 소풍을 즐기며 전쟁의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지 경치가 장관이었다. 푸른 바다 멀리 보이는 수많은 섬들과 기암괴석 등등. 그리고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해녀들의 모습. 나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위대한 제주도의 경관을 마음껏 만끽하며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무장공비 출현
하지만 이곳에서도 무장공비들이 가끔 약탈을 자행하고 주민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주로 한라산에 숨어 지내던 공비들은 인근지역에 내려와서는 방화하고 식량을 약탈해갔다. 나도 여러번 서귀포 이웃부락에 공비들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는 미사를 드리고 나왔더니 서귀포 시가지에 생포한 공비의 목을 베어 매달았다. 이는 다른 공비들로 하여금 서귀포 부근을 얼씬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경찰서에서 조처한 것이었다.
그러다 예수부활 대축일을 지낸 며칠 후 부산에 머물고 있던 노 주교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산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이때는 국군이 다시 서울을 재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릴 시기였다. 서귀포 본당 신자들은 내가 떠나기 전날 밤 조촐한 송별파티를 열어주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렇게 2개월간의 제주도 생활이 아쉬움 속에 끝났다.
처절했던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에 올라오자 나는 행주라고 하는 한강 옆에 있는 본당 신부로 발령 받았다. 그리고 행주본당 사제로 있을 당시인 53년 여름에 남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이후 다른데 머물 곳이 없었던 남동생은 나와 함께 생활하며 반년동안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이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고 싶다』고 말하더니 얼마 후 결혼을 하게 됐다. 남동생은 남자 여자 아이 하나씩 낳고 잘 살다가 20년전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제수씨가 아이들을 키우다가 그만 다섯 해 전에 남편을 따라 하늘나라로 갔다.
사제된 조카 자랑스러워
졸지에 부모를 잃은 두 조카중 여조카는 결혼해 나와 같이 살고 있고 남자 조카는 내가 공부를 시켰다. 나는 그 조카가 대학 진학문제로 상의해 왔을 때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나와 함께 사목자로서 일생을 주님께 바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그러자 남자 조카는 흔쾌히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했고, 정말 신부가 됐다.
이때만큼 기쁘고 조카가 자랑스러웠을 때가 없었다. 이후 나는 어린 조카 신부가 있는 본당을 찾아가 가끔씩 미사를 함께 집전하는 기쁨을 가지기도 했다.
이젠 노환으로 눈이 어둡고 귀가 안들려 거동하지 못하고 이렇게 집에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 그저 앞으로 내 소원이라면 빨리 천당에 가서 주님을 뵙는 것이다. 부족했던 삶이었지만 일생을 사제로 살 수 있었기에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그분의 길을 따르려는 사제들로 풍성해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다음호부터는 전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의 삶과 신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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