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수도회로 인준된 예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항하며 가톨릭의 근대화 세력을 주도해왔다. 이냐시오 성인을 비롯한 수많은 예수회원들은 450여 년의 역사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러시아까지 전세계로 활동범위를 넓혀가며 오늘의 예수회 역사를 만들어오고 있다.
오늘의 예수회가 있기까지 그들의 발자취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과 격론을 벌이고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며 교회를 지켜온 예수회는 교황청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급속도로 성장했다. 수도회 창립 당시 7명이었던 회원들은 18세기 중반 2만 3천여명의 회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냐시오 성인 당시부터 존재하던 가톨릭 교회내 반대세력 때문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1773년 예수회 활동의 중단을 지시했다. 이로써 예수회는 정부에 의해서 보호됐던 러시아에만 200여명의 회원이 남았을 뿐 모두 해산됐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1814년 예수회는 다시 활동이 허용됐고 인도, 이집트, 극동 등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아시아지역으로 선교범위를 넓혀간 예수회와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초대교회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소서행장을 따라 부산에 상륙, 종군했던 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국 땅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했던 것이다. 또 서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천주교리를 받아들였던 남인학자들이 가톨릭을 연구하고 공부했던 책도 다름 아닌 예수회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였다. 이뿐 아니라 당시 수도회가 해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북경을 찾았던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것도 예수회 그라몽 신부였다.
초기교회 때부터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어온 예수회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부터다. 한국 주교단의 요청에 이어 교황 비오 12세의 명을 받은 예수회는 1954년 10월 일본에 있던 독일인 예수회원 테오도로 게펠트 신부를 입국하게 했다.
6?5 전쟁 후인 55년 한국의 예수회는 설립됐으며, 60년 서강대학교 건립, 64년 예수회 수련원 등을 마련하면서 예수회 한국지구가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한국진출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130여명의 회원들이 함께하는 큰 규모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예수회는 서강대학교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청소년 야간학교, 노인복지시설, 선교본당, 도시빈민사목, 피정센터 등의 사도직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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