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행운아라고 믿고 살아왔다. 신부님을 보고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신부된다」고 희망했고 여덟 살 때 선생님을 보고는 「선생된다」고 바랐던 내가 신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생도 되어 두 가지 소망을 다 이루었으니 말이다. 나를 사제로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사제로 은경축을 지낸 다음해인 1974년 사제직의 완성인 주교직에 불러주시어 1998년에는 사제 수품 50주년으로 금경축을 지내고, 1999년에는 주교 서품 25주년으로 은경축을 지내게 되니 이처럼 행복한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서 그렇게도 갈망했던 사제직으로 일생을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왔으니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여전히 사제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1922년 6월 4일 간도성 연길현 다조구 대령동 멍개골에서 아버지 김덕기(안드레아), 어머니 김성녀(안나)의 1남2녀 중 가운데로 태어났다. 세 살 많은 누님 김남순(아녜스)과 다섯 살 터울인 김남옥(마리아) 그리고 나, 이렇게 삼남매가 자랐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지 3일만에 세례를 받았는데 자라면서 조과(아침기도), 만과(저녁기도)를 안 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벽에다 십자가를 걸어놓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기도를 바쳤다. 부모님은 기도의 모범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영세 전까지 글을 전혀 깨치지 못한 분이셨으나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교리문답책을 그대로 외워 찰고(교리시험)에 통과하셨다고 했다. 그 때 암기한 것으로 문답책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한글을 깨치셨고 그렇게 익힌 교리를 그 후 우리에게 아주 쉽게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성당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늘 성당 주위로 이사를 다니셨다.
1920년에 원산교구가 설립되면서 서울교구 관할지역이었던 간도지역은 1922년 원산교구 관할로 편입돼 원산교구를 담당하던 성베네딕도회의 새로운 선교지가 되었다.
계란먹고싶어 신부될 결심
마을에서 미사 후 외국인 신부님을 대접할 때는 평소에 우리가 구경도 못하던 여러 가지 맛있는 반찬이 있었는데 특히 계란을 삶아서 송송 썰어놓은 것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계란이 먹고 싶어 어머니께 따졌더니 신부님이 된다면 계란 뿐 아니라 닭도 잡아주겠다는 말씀에 그 때부터 나는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고 또 아침마다 미사연습을 했다. 미사 연습이란 다름 아니라 감자를 동글납작하게 썰어 가족들에게 성체처럼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생감자이니 누나는 번번이 인상을 썼지만 나는 막무가내였고 부모님은 내가 신부님이 된다고 하니 마냥 좋으셔서 내 미사에 기꺼이 참여하셨다. 그 때 내 나이 여섯 살이었다.
당시 간도에는 한국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성베네딕도회에서는 신부님들이 파견되는 곳마다 성당과 함께 '해성학교'란 이름으로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대령동성당은 1926년 설립되었는데 역시 본당과 함께 학교를 설립했다.
나는 1930년에 입학하여 첫영성체 교리를 받고 그 해 12월 26일에 첫영성체를 했다.
성체를 받아 모시자 정말 예수님이 내 몸안으로 들어오시는 것 같았다.
첫영성체를 하고 나자 나는 바로 보미사(복사)에 뽑혔다. 본당에서는 매일 새벽 6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나는 항상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성당으로 가서 복사를 섰다. 미사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밥을 먹고 학교로 갔다. 그렇게 복사를 열심히 잘했기 때문에 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본당주임이자 학교교장이셨던 살바토르 신부님은 형편없는 학교성적에도 불구하고 나를 신학교에 보내주셨던 것 같다.
대령동 해성학교는 수도회에서 성당 울타리 안에 세운 학교였으므로 종교생활과 학교생활이 별개일 수 없었다. 학교에서 종교행사를 할 때면 수업을 전폐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교시간이 있어서 우리는 교리를 담임선생님께 배웠다. 선생님들은 모두 열심한 신자들이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생님이 되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신부님이 되겠다는 꿈을 버린 것이 아니라 꿈이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야학개설, 수학 등 가르쳐
6학년이 되어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신학교 입학절차를 받기 위해 덕원신학교로 갔다. 한 일주일쯤 지내고 나니 교장신부님께서 부르시면서 말씀하시길 금년에는 신입생을 받지 않는 해라고 했다. 그 때는 입학생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격년제로 신입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교장신부님께서 내년에 오라고 하셔서 결국 집에서 일년 동안 지내게 되었는데 그동안 했던 일이 야학 활동이었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가르치는 걸 참 좋아했다. 살바토르 신부님의 후원으로 해성학교 교실을 하나 빌려 야학을 개설하고 거기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이었고 처녀들도 있었다. 주판, 수학, 우리말, 우리글 등 학교에서 배운 온갖 과목을 다 가르쳤다. 초등학교 때 성적이 엉망이었으면서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만큼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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