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유행하던 말 중에 「공주병」, 「왕자병」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으로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전제가 깔린 미성숙한 정신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통제력의 착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말 그대로 세상에 대한 통제력의 착각인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내가 축구 경기를 보지 않아 한국이 일본에 졌다던가, 혹은 어느 전직 대통령처럼 나의 기에 눌려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믿는 정신상태이다. 이런 모습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시각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이 두 인물들은 너무나 극단적인 요소를 가진 인물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 우리는 이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모범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 유다인들은 일년에 한번 속죄의 날 단식하면 되는데 이들은 이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고, 더 나아가 다른 유다인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생산했을 때 한해서 그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데 비해 이들은 이자 수입을 포함해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 뿐 아니라 혹시 시장에서 산 물건도 생산자가 십분의 일을 바치지 않았을까 염려하여 물품구입 때도 십일조를 바치곤 하였던 종교적 열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세리는 부정축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당시에는 지방세를 거둘 때 관리를 두어 직접 징수하지 않고 세관별로 임대를 주어 징수하게 하였다. 따라서 「세리」라는 인물은 임대차 계약에 의해 실제로 관세를 징수하는 민간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주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관세를 매겨 일부는 다음의 임대차 계약을 위해 검은돈으로 상납하고 일부는 자신의 치부를 위해 사용하였기에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기도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바리사이의 기도에서 특이 사항을 발견할 수도 없고, 거짓 기도라 믿을 내용도 없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올바른 기도는 바리사이의 기도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올바른 삶을 살아 바리사이처럼 당당하고 멋있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리의 기도를 보면서 많은 죄를 저지르면서도 생활의 개선없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은 뻔뻔스러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기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하느님께서는 세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했을까 ?우리는 이 두 기도의 차이점을 여러가지 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당함 대 겸손함, 감사의 기도 대 용서의 청원, 그리고 의인의 기도 대 죄인의 기도, 독백 대 대화 등등.
그러나 필자는 이 두 기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기도 드리는 사람의 위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바리사이의 기도에서 문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주어가 『저는』)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여기에 비해 세리의 기도에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이요 세리는 손님의 자리(객어)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요,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눈과 뜻으로 나를 반성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를 놓고 볼 때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훌륭하고 당당한 면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기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었고, 나를 중심으로 나와 하느님을 보는 마음, 하느님을 주변부에 놓으려는 태도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였던 것이다.
여기에 비해 세리의 기도는 비록 짧고 내세울 것도 없는 초라한 기도였지만 하느님을 주인의 자리에 놓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보려는 갸륵한 마음이 있는 기도, 하느님이 중심을 차지하는 기도인 것이다.
아마도 이 차이가 이 두 기도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단순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만이 아니라 자기네만 옳은 줄 알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아니 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처세에 대한 교훈인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교훈은 이것이리라 ! 「하느님」을 주인의 자리에 모시고 「나」를 봐야 한다고,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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