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선교사로 또 레지오마리에 단원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이어오며 특히 교회신문 등 출판물 보급에 앞장섰다. 그것이 인연이 될 줄이야.
카네이션보다 붉은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 시절, 초등학교 1학년 어린나이에도 유달리 모범적이던 한 어린이가 봉쇄수도원의 수녀가 됐단다. 어느날 찾아든 한통의 편지 그리고 수십년 만의 만남. 얼마남지 않은 삶, 하느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듯 하다.
이른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비까지 뿌리더니만 금새 파란 제 빛깔을 드러낸다.
하긴 오늘 같은 날 좀 흐린들 어떠랴. 양손에 한가득 선물 보따리를 쥐고 수도원 오르막 길을 오르는 노(老)스승의 발걸음은 그저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다. 42년만의 만남. 이런 날이 올줄이야…. 『이승에서의 삶을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구나』『얼마 남지않은 삶, 하느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되겠지』하고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10월 16일 낮 12시 40분, 고성 가르멜수도원 면회실에서 이우락(76·글레멘스·부산 남산본당)씨와 나자렛의 로사리아 수녀의 사제(師弟)간 만남은 4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그렇게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찬미예수님. 선생님, 무더운 날씨에 평안하시온지요…. 저는 40여년전 부산 영성국민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의 제자였던 강영희(로사리아 수녀)입니다. 그때 저의 집은 학교 후문 맞은 편에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장학사로 계셨는데…. 선생님 기억나시옵니까?…』 지난 8월 중순, 뜬금없이 날아든 한통의 편지. 40여년전 제자로부터의 소식에 이씨는 며칠밤을 뜬 눈으로 넘겼다. 그리곤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가슴 설레이고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교직생활 47년 3개월 중 담임을 하고 직접 가르친 햇수는 28년. 그중에 가장 꽃을 피웠던 해가 바로 1959년 수녀님을 맡았던 1학년 1반 시절이었습니다…』
옛 제자에 대한 스승의 기억은 놀랄 만큼 또렷했다. 『강수녀님의 1학년 당시의 인상은 매우 용의가 단정하고 가정교육(양질의)을 잘 받았기 때문에 학교생활의 모든 면이 규범적이어서 편지를 받는 즉시 즉각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답장과 함께 40년을 넘게 지니고 있던 당시 봄소풍 사진과 강수녀에 관한 몇가지 기록들, 그리고 정년기념 문집을 선물하며 스승으로서의 애정을 드러냈다.
이들의 극적인 상봉은 가톨릭신문과 경향잡지에 실린 옛 은사에 관한 글을 본 강수녀가 지난 8월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비롯됐다. 이우락씨는 91년 교단을 떠난 뒤 부산지역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40여년간 레지오마리애의 열성 단원으로 활동하며, 특히 교회 신문, 잡지 등 출판물 보급에 앞장서온 인물.
『아이고 수녀님』
『선생님』
반가움에 손을 맞잡은 이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발갛게 상기된 두 사람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어색함을 피하려는 듯 이것 저것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놓는 스승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성지순례 때 사온 묵주를 선물하고, 1학년 당시 담임지도록을 펴들고 설명하는 스승과 스승의 꼼꼼함에 또한번 탄복하는 제자수녀. 이들은 어느새 42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깊은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시는 모습이 꼭 예수님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니신 분께 배운 저는 참 복되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그때의 강수녀님은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두드러졌었지요. 교육자이신 아버님과 어진 어머님한테서 잘 교육받은 아이였습니다』 1시간 가까이 계속된 이날 만남에서 두 사람은 그간 주고 받은 편지만큼이나 애틋한 사제의 정을 나누며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렸다.
『몸은 가지만 마음은 늘 수녀님과 함께 있을겁니다』
『40여년 떨어져 있었어도 선생님은 주님 안에서 늘 저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수도원을 나서며 자꾸만 뒤돌아 보던 이씨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수도원 뒷산 자락을 멍하니 바라다 보는 노(老) 스승의 눈가가 또 촉촉히 젖어온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노 스승은 혼잣말처럼 되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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