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불멸의 꿈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꿈이요 인류 역사의 가장 오랜 허망(虛妄)이었다. 진시황을 꼽지 않더라도,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척박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꿈을 포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본능적인 갈망을 어느 누구도 완전히 채울 수 없었음을 또한 잘 알고 있다.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
실제로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죽음이 「사람들의 것」이지 「나의 것」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이의 죽음은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라는 서양사람들의 묘비에 쓰여진 글처럼 삶의 허망한 의미가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내게로 전해질 때 우리는 참 생명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죽음으로 인해 삶이 그치고 인생 자체가 무상하다고 느끼게 될 때 과연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는 혼란스럽게 된다.
여기에 하느님은 인류 역사 안에서 그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다.
죽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며 우리의 삶을 유한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교회는 인간의 원죄에서부터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지배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죄의 결과가 바로 죽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죽음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예외없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를 전해준다. 죽음에 직면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 또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했기에 인간 생명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따라서 죽음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는 친교 관계에 의해 좌우되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활의 희망은 묵시문학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신약에서 죽음의 의미는 더욱 심화된다. 예수의 죽음 이해는 두 가지의 기본 성격을 갖는다. 하나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이 죽은 뒤에도 친교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예수가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서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말고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마태 10, 20 루가 12, 4~5).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의 희망에 관해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구원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원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과 정면으로 대결해 죽음이 그리스도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죽음을 쳐 이기고 참된 의미에 있어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없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완성의 과정이며 승리의 상징이고 영원불멸한 생명의 시작이 됐다.
특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한 방법은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역시 인간과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해 피땀 흘려 기도했다(요한 12, 27). 고통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했고(루가 22, 42), 결국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고통받고 죽었다(마태 27, 46).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과 죽음을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기꺼이 받아들였음을 알고 있다.
죽는 것이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에게도 그 오묘한 섭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현세를 사는 인간들의 솔직한 바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못지 않게 현세의 풍요한 삶도 함께 누리는 것일 것이다.
이에 대해 성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 23~24)라고 말한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바쳤듯이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한다면 그리스도가 주는 풍요로운 생명에 참여할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오히려 생명을 얻으려는 자세는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다. 그럴 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 25~26)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물리쳤기에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육신의 죽음은 무의미하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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