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내가 덕원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신입생은 전부 24명이었다. 그중 우리 본당에서만 일곱 명이나 갔으니 우리는 기를 펴고 살았고 신학교가 개방적인 편이었으므로 나와 입학 동기생들은 산으로 들로 모여 다니며 참 신나게 지냈다.
신학교 교육과정은 소신학교 과정으로 중등과 5년, 고등과 2년, 대신학교 과정으로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 해서 모두 13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어 있었다. 신학교에 입학하자 그동안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아온 나는 공부를 못해서 쫓겨나면 어떡하나 싶어서 좀 겁이 났다. 기초가 없어서 무척 힘들었고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덜 자는 방법밖에 없었다. 신학교는 아홉 시면 소등을 했고 그 당시에는 손전등도 없었기 때문에 이불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늦도록 공부하다가 선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첫 시험을 쳤는데 윤 빅토리노(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가 삼등, 내가 사등이었다. 이십명이 쫓겨나야 내 차례라 생각하니 좀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신부될 생각만 하면서 공부는 계속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는 신학생이 되면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고 그후 윤대주교와는 계속 일, 이등을 다투었다.
신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정이 든 것은 소신학교 시절의 동창들이다. 동기생 중에는 시를 쓰는 구상준(구상) 등 문학, 음악, 미술 방면에도 재주있는 친구들이 많아 학창시절을 참 풍요롭게 지냈는데 애석하게도 24명중에 신부된 사람은 나와 윤공희 대주교, 이종순 신부(1924~1996), 최명화 신부( 1924~1975) 이렇게 넷밖에 없다.
그때는 월반이 가능했으므로 나는 고등과 1년을 마치고 철학과에 월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윤대주교가 마음에 걸렸다. 같이 월반하자고 했더니 괜히 관면 받으면서까지 신부될 필요는 없다면서 혼자 올라가라고 했다. 그때는 24세가 되어야 신품을 받을 수 있었고 나이가 모자라면 교황청에 관면을 받은 후 신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려서 계란 때문에 신부가 되겠다고 한 나는 신학교에 와서는 계란 소동으로 쫓겨날 뻔 한 적도 있었다. 당시 신학교에는 특별한 영양식이 없었고 대신 일년에 두 차례 시험 때가 되면 수요일과 금요일에 대신학생들에게만 계란구이가 주어졌다. 소신학생과 대신학생이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소신학생 때 그 계란구이가 참 먹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학생이 되면 이걸 바꾸어 놓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월반하고 첫 시험 때 드디어 나도 계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내게 주어진 계란 접시를 들고 교장 신부님 앞을 지나 가운데를 통과하여 제일 어린 소신학생에게 주고 왔다. 그것이 대신학생들 속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다. 상급생들은 나를 끌고 휴게실로 가더니 보따리를 싸는게 좋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겁이 났고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라가 더욱 가난해져 계란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까지 잠시나마 전교생이 계란을 먹을 수 있게 됐다.
1942년 일본이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를 폐쇄시키는 바람에 신학생들은 덕원신학교로 와서 공부하다 돌아갔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공산정권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번에는 덕원신학생들이 서울로 가 자연스레 어울려 공부하게 됐다. 이처럼 남한과 북한의 신학교가 한 덩어리가 된 것은 지금 생각해볼 때 전체 교회 발전을 위해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구호물자를 대주었는데 이 구호물자를 주로 성당에서 나누어주었으므로 이로 인해 남한교회는 전교에 큰 도움을 입었다. 그런데다가 공산 치하의 박해를 피해 남하한 북한의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로 인하여 남한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이에 따라 서울, 대구, 광주, 전주, 춘천밖에 없었던 교구가 날로 증설되면서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 주교를 비롯해 나와 박정일 주교 등 덕원 출신들이 주교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이는 분단 이후 남한 교회에서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신학교를 잠시 떠난 적이 세 번이나 있었는데 처음 두 번은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어서였고, 마지막은 철학과 2학년 겨울방학 때 일본에 징용을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신학교를 떠났던 일은 내겐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고 나의 사제성소를 더 탄탄하게 해주었다.
1948년 부제품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에 의해 만주의 한 수용소로 끌려가신 연길교구장 백 주교님께서 천 조각에 타이핑을 해서 보내신 유학명령서를 전해 받았다. 신부가 되어 보았자 공산치하에서 연길교구로 못 돌아올 상황이니까 허송세월 하느니 로마로 유학가서 공부를 계속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부를 시원하게 못해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을 때니까 내겐 참 잘된 일이었다.
로마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사제품을 받아야 한다는 주교님들의 말씀에 따라 1949년 봄에 사제품을 받기로 되어있던 나는 예정보다 조금 앞당겨 1948년 10월 17일 덕원의 신 보니파시오 주교님께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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