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부활에 대한 논쟁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부활이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이 없다는 논리를 증명하려 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결혼은 이 세상의 일이기에 저 세상에는 장가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는 해석이 쉽지 않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호칭이 부활을 증거한다고 이중으로 답변을 한다. 여기서 부활을 증거하는 구약성서의 인용은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언행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서대목을 찾아내어 그분을 옹호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때문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본 대답은 아마도 『저 세상에는 결혼도 없고 죽음도 없다』란 말씀으로 끝났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오늘의 이 부활 논쟁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두가이파의 등장 배경은 이렇다 한다. 기원전 152년경 요나탄이라는 인물이 왕권과 대제관직까지 겸하자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반기를 든다. 이들 중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집단이 너무나 유명한 「바리사이파」사람들이고, 일부 제관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집단이 신자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단어이지만 「에세네파」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대다수의 제관들과 예루살렘 유지」들은 정권에 동조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 성서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은 오직 모세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고 있었고, 거기에 따라 부활의 삶을 부정할 뿐 아니라 천사의 존재도 부정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성향을 이야기하자면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을 누리며 정권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취했고, 종교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현실론자들이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것이다.
얼마 전 IMF 시대. 많은 이들이 실직의 아픔을 겪으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금리로 고생하고 있을 때 일부 가진 자들이 「이대로」를 외치며 고급 룸살롱에서 수백만원짜리 양주로 축배를 들면서 자기들만의 특권을 향유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아마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을 대변한 것으로 본다.
이런 사람들이었기에 이들은 오직 현실적인 것만이 그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부활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저 세상이 없어야만 이 세상의 삶이 유일한 것이 되고, 이 지상에서 누리는 물질적 번영과 권력이 그리고 적당한 현실과의 타협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는 오늘의 이 질문의 의미는 한마디로 진리를 저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며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욕구의 한 표현인 것이다.
기회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이 세상과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현실만이 삶의 모든 것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이들은 예수님 시대만 기득권을 누리고 현실을 향유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2000년 후 이곳 한국 땅에서도 똑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지는 않는 지 반문하게 된다. 어쨌든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저 세상에는 결혼도 없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 안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나 이승의 삶이 모든 것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저 세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저 세상은 이승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에 저 세상은 이 세상의 논리나 이성의 논리만으로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때문에 저 세상의 일을 단순히 「이 세상의 논리」나 「도덕적 규범」으로 판단할 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성서나 도덕적 윤리적 규범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틀로만 읽거나, 기득권의 유지나,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이론적 준거의 틀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앙보다 이성이 강조되고, 저승의 삶보다 이승의 삶이 더욱 더 큰 가치를 가지는 사회. 그리고 기득권 층일수록 「법과 정의의 준수」보다는 「법과 질서의 교묘한 이용」이 횡행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참으로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내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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