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후 유학을 떠나기 위해서는 남한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48년 12월 1일 밤을 틈타 해주에서 작은 배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월남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해 노기남 대주교님께 인사를 드린 후 유학을 갈 때까지 본당에서 일할 수 있도록 청했더니 노대주교님은 혜화동본당 보좌신부를 명하셨다. 당시 혜화동본당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인 다피도 신부님이 주임, 조창희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계셨으니 제2보좌인 셈이었다.
이리하여 혜화동본당 보좌 생활이 내 사제 생활의 시작이 되었는데 나를 가장 좋아했던 분들은 바로 할머니들이었다. 평일 미사에 나와서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이 한 일고 여덟 분 계셨는데 주임신부님은 서양인이니 아무래도 격이 있고 조신부님보다는 내가 새파랗게 젊고 목소리까지 컸으니 큰 인기였다. 나중에 내가 로마로 간다고 하니까 할머니들이 좋아하시면서도 가장 섭섭해 하셨다. 1원 짜리, 50원 짜리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며 나의 유학길을 걱정하고 격려해주시던 주름살 가득한 얼굴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나도 그 나이가 되고 말았다.
1949년 8월 20일 드디어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혜화동 본당에서는 로마로 유학가는 첫 신부였기 때문에 환송식이 아주 요란했다.
로마에 가서 나는 성 베드로 기숙사에 묵으면서 우르바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출신교구인 연길교구가 공산화되어 사라지고, 1950년 교구장인 백주교님마저 병환으로 선종하시자 나는 천애고아가 되어 후원자도 한명 없이 가난한 유학생활을 보내야했다. 학비, 기숙사비는 무료였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다닐 버스비가 필요했으므로 교수 신부님의 강의를 모두 받아 적은 강의록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잡비를 벌어 쓴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해가 지나면서부터는 외국어도 제법 하게 되어 미사를 집전해 주며 경제적으로 좀 여유있게 살게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즐기는 담배를 피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행복한 경제생활이었다.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가 1950년, 우리나라에 6·25가 발발했을때여서 논문 주제를 조국의 수난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결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런데 담당 교수신부님이 동양인인 내게 불교의 고통관에 대해 언급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는 바람에 결국 논문 전체가 불교를 다루게 되고 말았다.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사회학 공부를 하던 중 논문이 통과되자 교황청 포교성성에서는 내게 귀국할 것을 재촉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사회학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채 로마 유학생활 3년반 만에 귀국했다.
포교성성에서 마련한 배편으로 귀국하는 길에 왜관으로부터 온 긴급 전문을 받았다. 덕원 수도원이 당시 왜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내게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낸 것이었다. 비로소 갈 곳이 정해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귀국한 날짜가 1953년 4월, 7월에 휴전이 되었으니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때였다. 왜관본당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순심중학교 윤리교사로 발령을 받아 1년간 교사직을 수행했다. 이후 순심고등학교가 설립돼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에 맡겨졌고 수도회에서는 나를 순심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했다. 신부와 교사, 어릴 적 꿈 두 가지가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 때 나의 교장직 수행 방침은 교사들이 적극성을 띠며 일할 수 있도록 배려만 해주고, 책망하거나 꾸짖는 일은 되도록 피하자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지배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데 각자에게 맡겨진 일들을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면 정성을 다해 맡은 사명을 완수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그때 갖게 되었다.
그러한 방침은 내가 주교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고 그 당시 학교에서의 경험이 주교직 수행에 있어 큰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아랫사람에게 되도록 잔소리를 하지 말고 협력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장상이 해야 할 몫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교구의 사제들에게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배정해주고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바로 주교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당시 대구교구장이셨던 최덕홍 주교님이 내게 상주 데레사를 책임지고 지도해보라고 분부하셨다. 그러던 중 최주교님이 선종하시고 서정길 주교님이 부임하시자 이 일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셨고 '데레사 사건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는 공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나는 별 상관하지 않고 계속 데레사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기 때문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참사회의에서는 내게 교장직을 그만두게 하고 휴양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 나는 사제가 부족한 부산으로 가는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아들여 부산으로 향했다. 이 일이 훗날 어떻게 정리될지 모르겠지만 그 역사가 나를 주교직까지 끌어올리는는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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