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2월에 부산으로 가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님을 만났더니 양정본당에 부임해 성당을 지으라고 하셨다. 양정에 갔더니 빈터만 덩그러니 있어 먼저 사제관으로 쓸 판자집을 대충 마련해놓고 신자들과 터부터 닦았다. 신자들과 함께 직접 곡괭이질, 삽질을 하면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어렵게 성당 터를 닦아 1960년 2월 기공식을 갖고 7월 마침내 새 성당을 완공할 수 있었다.
아녜스 할머니의 선교 열성
전교수녀님도 없던 양정본당에서 내 오른팔 역할을 한 분이 계셨으니 아녜스 할머니란 분이셨다. 매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아녜스 할머니는 양정본당을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헌이 많은 분이다. 아녜스 할머니가 주로 하신 일은 예비신자 모집과 냉담신자 방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 온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도 할머니가 하셨다. 어떤 때는 예비신자가 백 명이나 모이기도 했으니 순전히 아녜스 할머니의 열성적인 전교 활동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세례받기 한 달 전쯤 되면 내가 인수받아서 가르쳤다.
부산교구 양정본당과 이후 서면본당에서 사목을 하던 9년간은 고통도 별로 없었고 크게 고생했던 기억도 없다. 부산에서는 대양학교 교장도 하고 가톨릭학생회,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 신부도 함께 하면서 본당사목을 했으니 본당에서 머리가 아프면 학교로 가고, 학교에서 머리가 아프면 본당으로 가고 하면서 아주 즐겁게 살았다. 그래서 부산 생활이 내 사제 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빛나는 시절로 무척 보람있었고, 신명나게 잘 살았다.
1966년 한국인 신부로는 처음으로 주교회의 사무총장직을 임명받아 1973년까지 활동하게 되면서 새로운 사목 생활이 펼쳐졌다. 한국교회에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처와 주교회의를 만든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막 끝난 1965년이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교회를 누볐다면 과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변화과정을 피부로 가장 먼저 제일 진하게 느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더군다나 내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받았을 때의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엄청난 변화 물결로 혼돈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교회 역시 주로 교회의 질서를 잡는 일에 치중했으며 그 모든 관련 실무가 상당부분 내게 주어졌다.
사무총장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은 주교회의 규약을 만드는 것으로 로마에서 전해온 견본을 가지고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 일이 한 2년간 걸렸다. 그때에는 주교회의의 행정부서도 없었고 주교회의 또한 정기적으로 개최되지 않았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주교들이 시간을 정해 서울에서 몇 차례 회의를 했다.
이후 임기동안에는 주로 공의회 후에 쏟아져 나오는 문헌과 새 전례서 번역 작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나는 사무총장이 되기 전인 1965년부터 미사통상문을 새로 만드는 작업에 함께 했고 이후 8년 동안 전례위원회의 일까지 하면서 전례서 번역을 거의 도맡아 했다. 그리고 주교가 된 후에도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거의 13년 동안 주교회의 전례위원장직을 수행했으니 전례 개정에 따른 전례서와 공의회 문헌의 후속 조치로 나온 담화문, 회칙 대부분이 내 손으로 번역된 셈이다.
약방의 감초 노릇 톡톡
사무총장직을 회상할 때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개최됐던 24위 한국순교성인 시복식에 관련한 뒷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시복식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준비했는데 시복식에 참여할 한국 신자들의 파견 업무를 주교회의 사무처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출발을 불과 며칠 앞두고 참가자 136명의 여권을 중앙정보부에서 내줄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전세기를 내어 유럽에 다녀온 일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난감해하던 와중, 다행히도 정의채 신부님(현 서강대 석좌교수)께 교리를 배우고 있던 청와대 비서 하나가 대통령의 힘을 빌어 일을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던 사연이 기억난다.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안팎으로 필요한 곳이 있으면 끌려 다녔으니 약방의 감초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중 하나가 대북 방송출연이었다. KBS 라디오의 북한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종교인이 필요할 때면 늘 나를 불렀다. 그들이 정해주는 주제대로 원고를 써서 북한에 있는 우리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또 약방의 감초로 쓰인 곳이 신학교였다. 서울 신학교에서는 교수 신부님들이 안식년을 맞아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나를 불렀다. 그때 내가 맡은 과목이 교리신학, 사목신학, 교부학 등으로 전공이 아님에도 별 것을 다 가르쳤다. 그렇게 계속한 서울 신학교 보충 강의는 주교가 되어서도 서너달 계속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