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오전10시. 성모동굴을 오르는 서정웅 신부(부산교구 언양본당 주임)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성모동굴과 14처 봉헌식이 있던 날. 바로 이곳에 성모동굴을 꾸미려던 꿈이 74년만에 이루어지는 날이다.
일곱달 동안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혼란과 고통과 망설임 속에서 오늘이 있기까지 「믿음」에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따라준 신자들이 눈물겹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발길을 인도해준 성령의 도우심을 어찌 모르겠는가.
성모동굴이 있는 성당 뒷산은 74년 전, 초대 주임 신부였던 에밀 보드벵 신부(파리외방전교회)가 매입했다고 한다. 70여년을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성모동굴의 꿈」은 그동안 두번에 걸쳐 시도됐으나 여의치 않았다.
지난 4월, 부임한 지 두달을 막 넘기던 때 서신부는 무작정 삽 한자루를 들고 산을 올랐다.
한치 앞도 안보이게 뒤덮인 잡초와 잡목들에 찔리고 할퀴우며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며칠, 몇주일이 지나자 발자국 하나와 돌 하나까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교우들 중에 하나 둘씩 협조자가 생겨났고, 어린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작은 정성을 함께 모았다.
새벽마다 돌을 지고 산을 오르던 자매들의 기도부대, 틈날 때마다 작업복에 연장 들고 앞장서던 신부님과 형제들, 아무도 몰래 가만 가만 산을 오르며 기도산이 되도록 두손 모았던 수녀님들….
그렇게 길은 만들어졌고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 14처 가운데 첫 대형 십자가가 꽂히던 날, 신자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두터운 침목나무를 마치 골고타 산을 오르는 예수님처럼 등에 지고 구부정하게산을 오르던 형제들, 마치 개미군단처럼 14처 십자나무 둥치에 매달려 사포질하며 구슬땀을 흘리던 자매들, 길을 넓히고 돌을 가지런히 치우고 풀뿌리를 뽑으려 호미질 하던 이들의 모습이 성모동굴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언양성당 성모동굴에 얽힌 사연 중에 빼놓을 수 없는게 있다. 「개발대장」이라 불렸던 백안드레아(승훈) 형제(오른쪽 기사 참조). 혀를 내두르게 하는 백대장의 활약상은 이곳 신자들에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언양성당 성모동굴은 국내에선 유일하게 순수 천연 자연동굴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산 아래 멀리서도 바라다 보이는 14처 십자가와 석류알처럼 입을 벌린 동굴 입구, 들어서면 토막 토막 나무둥치로 만든 작은 의자들, 바위틈으로 뚝뚝 떨어지는 생명수 같은 물방울…그속에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한 루르드의 성모님.
『이곳에선 자연 그대로의 투박함과 인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만명의 무명 순교자들을 기억해야 하듯이 유명한 성모성지들을 닮기 보다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조용히 찾아와서 기도하고 평화를 얻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됐으면 합니다』
성모동굴을 조성하는 과정은 신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신앙의 결정체였음을 이제 확인할 수 있다.
『성모동굴 자체가 중요한건 아니지요. 그 일을 통해 하느님께로, 성령께로 향하는 마음, 그리고 서서히 각자의 마음속에 전해오는 작은 변화들…. 이것이 참 기적이 아닌가요』
▲ 한걸음 한걸음씩 길을 닦아나갔다.
▲ 무거운 침목도 직접 지고 올라야 했다.
▲ 뜨거운 햇살 아래 대형 십자가가 꽃히고…
■ 성모동굴 개발대장 백승훈씨
“기도산 다듬어가며 마음의 평화 찾았죠”
▲ 백승훈씨
『신부님 때문이죠 뭐』라며 좀체 속내를 내비치지 않던 그가 소주 몇잔을 들이키고서야 말문을 튼다.
『작년 봄에 세례를 받고 얼마되지 않아 한티성지 순례를 갔었죠. 오는 길에 「순교자들은 바로 밀알과 같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나도 밀알이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생기더군요』
지난 4월, 성모동굴에 오를 당시 백씨의 삶은 좌절 속에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 인생에서 하고싶은 일, 의욕은 많았지만 끝을 본 일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조각가가 되려던 그의 꿈은 완고한 부친의 반대로 꺾여버렸다. 사상가가 되고 싶었다는 청년기의 꿈들도 채 피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고마운건 접니다. 그 일이 아니었음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떨지 무섭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정신마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은 정신적 피폐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난 아침마다 거울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 얼굴이 너무도 무서워서. 그런 고통 속에서 성모동굴에서 기도하고 산에서 일하면서 저는 저를 찾아 다스리게 됐습니다. 기도산에서의 일은 제가 할 일이었기에 했을 뿐입니다』
작년 산불에 타 죽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자르는 일에서부터 껍질을 벗기고 나무둥치를 잘라 의자를 만들고, 길을 내는 일까지. 그가 없었다면 성모동굴은 완성되지 못했을거라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제 마음의 평온을 찾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교만함이 내 속에서 움찔거린다』며 『이제 당분간 교회 일에서 손을 떼게 해달라』고 조르는 그에게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한마디 툭 내던졌다. 『감사하다는 생각 밖에는…』
눈가에 맺히는 이슬을 취기로 감추려는 듯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키는 그의 굵은 손마디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