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이 있는 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한다.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은 단순히 외부의 사건이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울증도 정신병적인 원인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결국은 우울하기를 선택한 자신의 결과라는 것이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포기하고 상황을 통제하기 위하여 선택한 자신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택이론을 창안한 글라써에 의하면 심지어 정신질환행위도 알코올중독과 마약중독도 다 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론이 일부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행동과 감정의 문제에서 「주체의 책임성을 강조한 점」과 인간은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극을 초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선택을 통해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은 의의 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연중 제33주일을 지내면서 평신도 주일을 지내고 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 내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은 다른 사회와 비교해 볼 때 미약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많은 뜻있는 분들은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적이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원인과 책임을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교회제도나 평신도들에게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제도도 문제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의식도 문제의 원인일 수 있고, 흔히 지적하듯 평신도 자신도 문제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택이론에 의해 이야기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상황일 수 있지만 그러한 상황 자체가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각자의 선택의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평신도들은 평신도대로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그들대로 평신도 사도직 수행을 방해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개혁정책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실패의 원인을 「내」가 아닌 「타인」과 「상황」에서 찾음에 연유한 것도 하나의 교훈이 될 것이다.
때문에 교회의 정책 입안자들과 신학자들이 먼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될 때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새로운 이해지평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지면이지만 필자의 두번의 본당주임 생활과 몇 년간의 복지관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평신도들에 대한 의식 변화를 잠시 소개하고 싶다. 8년간 본당생활 동안에는 본당 안에서만 우리 평신도들을 보아 왔기에 때로는 실망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계속해서 본당신부로서 생활하였다면 이와 같은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98년부터 수녀원과 종합 사회 복지관에서 일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복지관은 사회 기관이기 때문에 사회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생기는데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필자는 우리 신자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 신자들 중에는 많은 사회단체와 기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특별히 내가 거주하는 지역만의 상황인지는 몰라도) 매우 많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훌륭히 한 기관과 단체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누군가 『평신도들이 사제나 수도자보다 오히려 더 성숙한 면을 가졌다』라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자원을 가진 한국 교회이기에 지금 현재 우리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상황을 뛰어넘는 바람직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이 있고 또 할 의지만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평신도들의 역할이 기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 것은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선택」은 역시 신앙 안에서도 중요한 하나의 덕목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도 이같은 점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의 전조인 성전이 파괴되고 전쟁과 반란의 소식이 들려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주적 파국과 박해 앞에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두려워해야 마땅할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해야만 당연한 상황에서 걱정하지 말라!』
이 말씀은 신앙인이란 외부적 환경과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감정과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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