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침의 문제점
▶낙태 : 의사 자의로 가능. 모자보건법에 배치. 태아 성감별도 가능
▶인공수정과 대리모 : 비배우자도 가능한 애매한 표현. 금전적 거래없는 친족간 대리모 허용
▶생명복제 : 생명체로서의 수정란·배아 불인정. 생명복제 허용
▶안락사 : 회복불능 판단 전적으로 의사에게 위임. 안락사 금지하는 실정법과도 배치
대한의사협회가 마침내 공공연하게 확정 공포한 의사윤리지침은 지난 4월 내부 지침임을 내세워 처음 내놓았을 때부터 종교계와 시민단체들은 물론 법조계에서조차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된 내용들이다. 현행 실정법 관련 조항에까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지침을 단 한 구절도 수정 없이 그대로 다시 확정 발표했다는 것은 애당초 이 지침에 대해 여론수렴이나 토론의 과정을 통해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신문은 이미 지난 4월과 5월 지침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해 엄청난 사회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한 바 있다.
낙태
「의사윤리지침」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조항 중의 하나는 낙태에 대한 내용이다.
지침 제54조(태아 관련 윤리) 제2항은 낙태와 관련해 『의학적, 사회적으로 적절하고 합당한 경우에도 낙태 시행에 신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의사가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 내리는 판단에 따른다면 낙태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하지만 무방비 상태의 태아를 살해하는 행위인 낙태에 관한 한 교회는 명백한 살인행위로 규정하고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현재 생명문제와 관련해 낙태를 조장하는 악법으로 비난받고 있는 현행 모자보건법은 제14조에서 △임신부나 배우자가 정신분열, 간질, 혈우병 등 유전성 질병을 갖고 있는 경우 △임신부나 배우자가 에이즈, 간염, 수두, 풍진 등 법정 전염병에 감염된 경우 △성폭력에 의한 임신 △친족간 성관계에 의한 임신 △임신이 모체의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경우 등 5가지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모자보건법은 타인에 대한 살해 행위인 낙태를 허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둠으로써 낙태 조장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으며 따라서 천주교를 포함해 종교계는 모자보건법 해당 조항을 삭제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확정 발표된 윤리지침은 이러한 모자보건법에 조차 배치되는 반생명적인 조항을 담고 있다. 현행 형법과 의료법은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낙태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의사는 곧바로 면허 취소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지침은 「의학적 사회적으로 적절하고 합당한 경우」 낙태를 시술할 수 있다는 취지를 명백하게 담고 있어 결국 의사가 판단하는 타당성을 근거로 경우에 따라서는 실정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낙태를 시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제54조 제3항의 경우에는 『의학적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태아 성감별 검사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태아 성감별 검사를 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어떤 경우에도 태아 성감별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행법과 배치된다.
현재 우리 나라의 낙태건수는 매년 150만건에서 200만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의협측은 윤리지침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이미 우리 나라의 의료계에서 암묵적 관행으로 수없이 낙태시술이 이뤄지고 있음을 들지만, 그것이 낙태를 허용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인공수정과 대리모
인공수정과 대리모에 대한 조항들은 현행법에는 없는 개념이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대리모 출산은 그 자체가 갖는 비윤리적인 요소와 함께 기초적인 가족관계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반생명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침 제55조는 『인공수정 등 법률로 허용된 방법으로 불임 부부가 자녀를 갖도록 돕는 행위는 허용된다』고 규정하고 『배우자 사이 이외의 인공 수정은 장려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특별히 배우자 사이 이외의 인공 수정에 대해 엄격한 금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또 지침 제56조는 『금전적 거래 목적의 대리모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금전적 거래가 없는 친족간의 대리모 관계 등은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교회는 인공 수정으로 인한 자녀 출산, 즉 배우자간 인공수정과 비배우자간 인공 수정 모두를 자연법에 거스르는 것으로 반대한다. 특히 비배우자간에 체외수정을 통해 자녀를 출산하려는 행위는 비록 오늘날 널리 확산됐다고 해도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행위로 비난하고 있다. 지침은 비배우자간의 인공 수정에 대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 않아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지침은 더군다나 대리모 출산은 인간을 단지 자기 혈통의 계승을 위한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경악스러운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금전적 거래 이외의 대리모 출산에 대해 허용의 여지를 둠으로써 극도로 비윤리적이고 반생명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대리모 출산은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여성의 몸을 단순히 인큐베이터로 간주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윤리적 혼란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가정이나 친족 관계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 오직 생물학적 혈통을 잇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고방식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 복제
생명복제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는 조항 역시 엄청나게 큰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인류의 복지 증진과 질병의 예방 치료를 위한 경우에는 생명 복제에 관한 연구를 허용한다는 취지의 이 규정은, 생명 복제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독단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집단적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인간 배아 복제 및 실험에 관해 교회는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오고 있다.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초안한 「생명윤리기본법」에서도 비록 잠정적인 조치로 냉동배아에 대한 제한된 실험을 허용함으로써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기본 원칙은 인간 배아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생명 복제 문제는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많은 윤리적인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윤리관을 훼손하지 않도록 보다 깊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협이 일방적으로 이같은 내용의 지침을 발표하고 확정적으로 선언한다는 것은 매우 독단적인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복제가 허용될 경우 야기될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며 심각하다. 최근 연이어 나오고 있는 인간 복제 문제를 포함해 줄기세포연구, 냉동배아의 처리 문제 등 생명윤리 영역에서의 생명 복제 문제는 그 핵심적인 논란의 대상이다.
생명복제에 대한 교회의 기본 입장은 수정란, 배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로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에 결코 어느 누구도 그 성장의 과정에 임의로 개입해서 생명체의 파괴를 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 복제에 대한 연구 허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이 지침은 반생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안락사
지침은 제30조(회복 불능 환자의 진료 중단)에서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자율적 결정이나 그에 준하는 가족 등 대리인의 판단에 따라 환자나 대리인이 생명유지치료 등 진료의 중단이나 퇴원을 문서로 요구할 경우 의사가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의협 측은 『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에 대해 치료를 중단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며 『사망 과정을 불필요하게 늘리지 않고 최선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의학적으로 치유 가능성이 없을 경우 적절한 절차를 거쳐 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이와 관련해 어느 정도의 허용 여지는 갖고 있다. 즉 말기암 환자처럼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 인공호흡기로 단순히 생명만을 연장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인 방법을 통해 생명을 연장해야 할 윤리적인 의무가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회복 불능에 대한 판단이 전적으로 의사에게 달려 있고 따라서 판정의 자의성과 오판이 어떻게 배제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객관적 판단 근거에는 문제가 있다. 또 일체의 안락사를 배제하는 실정법과도 배치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회복 불능 환자에 대한 진료 중단과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망 시점을 앞당기는 안락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 근거도 없다는 점에서 이는 좀더 깊은 사회적인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
즉각적 대응 필요
문제시되고 있는 「의사윤리지침」에 대해 한국교회는 여러 경로로 그 반생명적인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는 지난 5월 26일 회의에서 의협의 윤리지침이 소극적 안락사, 낙태, 대리모, 인공수정, 인간 복제 등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정면 배치된다는 점을 확인하고 각 조항별로 지속적인 연구와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로 결정했었다.
한국가톨릭의사협회 역시 윤리지침이 발표된 후 「의협 의사윤리지침에 대한 한국 가톨릭의사협회의 견해」라는 제목의 성명을 대한의협 측에 전달하고 『전국 한국가톨릭의사협회 회원들은 인간 존엄성 훼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의사 윤리지침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고 선언했다.
이 성명에서 가톨릭의협은 『현재 의학과 생명공학 연구가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지적하고 문제시되고 있는 각 항목들을 수정,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번에 확정, 발표된 지침은 이러한 교회의 입장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논의 과정을 살펴 볼 때 애당초 어떤 논의에도 그 가능성을 전혀 열어 두지 않은 채 다만 확정 시기만을 기다렸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가톨릭의협의 한 관계자는 『수정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 대답이 없었다』며 대한의협측의 무성의하고 독단적인 자세를 비난하면서 『오는 12월 1일 열릴 회장단 회의에서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이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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