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품을 받은 지도 만 57년. 어느덧 세월이 흘러 교구의 최연장자가 됐다. 은퇴 후 가끔은 너무 오래 사는 것이 후배사제들이나 교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남은 시간들도 주님 뜻 안에서 생활하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낸다.
그 동안의 사제생활을 회고해보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과 내가 하는 말들이 신자들과 후배 사제들에게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으며 하느님께서 지금의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나의 증조부모께서는 1866년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잊은터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구교우 집 자손으로 엄격하신 할아버지와 부모님께서는 우리 육남매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시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우리 집안은 순교자 집안인 만큼 꼭 훌륭한 신부가 나와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또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온 가족에게 묵주기도를 매일 바치도록 이르시고 가끔은 확인까지 하셨다.
우리 가족들은 당시 나바위본당 산하 안대동 공소를 다녔는데 난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는 것을 참 재미있어 했다. 또 모두들 생활이 어려웠던 때라 신부님들이 여러 사람들한테 대우도 받고 식사하는 것도 부럽기만 했다. 당시 이약슬 신부님께서 본당주임으로 계셨는데 나를 눈여겨 보고 영특하게 생각하신 신부님께서 신학교에 가길 권하셨다.
어느날 이신부님께서 부르셔서는 편지를 부치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그 편지는 바로 신학교 추천서였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부모랑 떨어져 지내면 외롭기도 하고, 신학교는 규율이 무척 엄하다고 걱정하시면서 꼭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다. 하지만 난 어린 마음에 『신학교에 가면 집도 2층이고 전기도 환하니 구경만 해도 가볼만 하다』는 말이 더욱 끌렸다. 특히 매주 나바위본당으로 미사를 봉헌하러 다니던 형님의 모습은 성소를 굳히는데 큰 도움이 됐다.
서울의 동성상업고등학교 을반 입학. 구체적인 성소의 길이 시작됐다. 동성상업고등학교에서는 동기가 21명이었고,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서는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전주의 이상호, 강윤석 신부와 장옥석 신부 등 총 4명이 동기로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지만 특히 유스티노 신학교 교장이셨던 에밀 따게(E. Taguet) 신부님은 아버지처럼 다정하셨고, 웬만한 실수는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하시며 감싸주시어 마음 따뜻하게 지냈었다. 또 신학교 생활은 대체로 즐겁고 열심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딱 한가지만 빼고는. 신학교 기숙사에서 겨울에 때가 타지 않도록 빳빳하게 풀먹인 잠옷을 입고, 역시 풀먹인 이불을 덮고 냉동실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은 마치 얼음덩어리를 안고 자는 것처럼 괴로웠다. 겨울방학도 없던 시절 겨울 내내 몸이 얼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학교측에서는 집이 유복한 학생들이 따뜻한 옷을 해와도 위화감을 일으킨다고 입지 못하게 했다.
난 처음 동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오르간을 배웠었다. 특기도 전혀 없었고, 운동신경은 영 둔해서 남들이 즐기는 운동에도 취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 오르간 연주는 너무 재미있어 했고, 재주가 있었는지 소신학생 시절 내내 미사 반주 등을 하며 전례를 도왔다. 대신학교 시절에도 성무부장을 맡아 여가 시간 내내 외출은 커녕 제병과 초를 만드는데 온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제병과 초 등을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했다. 한번은 부활 전날 초를 만들어야하는데 심지와 모양이 영 서지 않았다. 밤새 작업을 하다보니 너무 춥고 배도 고프고 해서 포도주와 면투(식빵)를 훔쳐 먹으며 『빵을 몰래 먹은 죄로 신학교를 나가도 내가 나간다』며 배짱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빵을 훔친 것을 들켰다. 하지만 밤새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결국 부활미사 전에 초를 완성하자 학장신부님께서는 식빵을 훔쳐 먹은 것도 웃음으로 넘겨 주셨다.
또 한번은 신학교를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외국 주교님이 오셔서 미사를 할 때였는데, 오르간 반주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준비를 했는데 미사를 시작하고 보니 향로에 불이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짐을 싸서 나가야겠구나』라는 생각에 간이 졸아들었다. 그런데 그때 교장이셨던 리샤르 주교님은 나를 불러 호되게 꾸중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털 웃음을 웃으시면서 『전례 일을 너무 많이 맡겨서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는 그대로 남아있어라. 너는 있을 사람이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실수 하지 않도록 주의해라〔며 엄하면서도 너그러운 꾸지람을 하셨다.
1939년에는 우리 전주교구에서 인재 양성이 시급하다 하여 고 강윤식 신부와 로마 유학을 가게 됐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세가 불안하고 뱃길이 막혀 결국 무산됐다.
「주님 저에게 영혼들은 주시고 다른 것은 거두어 주십시오!」(Domine, da mihi animas caetera tolle, 창세기 14, 21). 동양의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따라 이 성서구절을 사목좌우명으로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구 주교좌성당에서 당시 대구교구장이신 하야사카 주교님의 주례로 다른 세 동기와 함께 1944년 12월 22일에 부제품을, 23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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