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도 들지 않는 방안에 들어서면 크리스마스 트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던 지난 밤거리는 이내 낯선 세상이 되고 만다.
출근 시간에 맞춰 지하철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와 싸운 대가로 마련한 라면 세 봉지와 소주 한 병, 이 정도면 그래도 운수 좋은 날이다. 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0년이 넘게 영등포의 쪽방에서 살고 있는 박기태(가명·58)씨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희망이요? 아프지 않고 살다가 누가 묻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말끝을 흐리는 박씨. 그러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쪽방 사람들도 저마다 하나씩의 희망을 키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 희망 하나
「오늘의 반성 : 미사시간에 잠을 잤다(11월 18일 일요일)」
「오늘의 중요한 일 : 공부와 미사'(11월 22일 목요일)」
「내일의 할 일 : 미사 때 떠들지 말자(12월 1일 토요일)」
서울역 근처에 쪽방이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생긴 「공부방」을 꼬박꼬박 찾고 있는 진희(초교4)의 일기장에서는 쪽방 사람들의 희망을 읽을 수 있다.
꾹꾹 연필을 눌러 쓴 일기장에 담긴 얘기들은 여느 열살 난 아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선생님의 얘기가 들어 있고 오빠가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이 담겨 있다.
허름한 옥탑방을 개조해 만든 공부방은 쪽방거리 아이들에겐 난생 처음 맛보는 천국이다. 쾨쾨한 자신들의 집에 비하면 산뜻한 내부에 장난감이 있는 공부방은 하루종일 있어도 질리지 않는 곳이다. 진희도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집에 있는 시간보다 공부방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엔 공부방 한 모퉁이에서 모자란 잠도 청한다. 엄마가 죽고 난 후 처음으로 정을 붙일 사람들이 공부방엔 넘친다.
공부방 자원봉사자 김주미(데레사·서울 용산본당)씨에게 공부방을 찾는 10여명의 아이들은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쪽방에서 희망이 부쩍부쩍 자라는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공부방 교사들은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아이들에겐 처음이 될 성탄절을 위해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하는 집」이 일궈낸 또 하나의 희망인 공부방은 이제 쪽방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될 희망을 채워 가는 「사랑의 곳간」이 되고 있다.
# 희망 둘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 거리에 자리한 쪽방상담센터 「함께 하는 집」 김길순(아녜스) 소장은 얼마 전 주검으로 쪽방을 떠난 이상현(가명·44)씨만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고 만다.
한평 남짓한 쪽방에서 살았던 그는 오랜 알코올중독으로 간경화, 간염에 최근에는 알코올성 간질까지 앓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순박하기 그지없던 이씨는 김소장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처럼 따랐다. 김소장은 주민등록도 없던 그가 국민기초생활보장을 받게 하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술을 먹고 발작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갔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이씨가 세상에 남긴 거라곤 아홉살배기 딸 은주, 부인 허씨는 더 큰 절망을 짊어지게 됐다.
『병만 나으면 잘 살아보자고 해놓고는…』
먼저 떠난 남편을 원망하는 허씨의 푸념 속에서는 은주를 위해 새로운 희망 찾기에 나서는 엄마의 은근함이 비쳤다.
# 희망 셋
좁은 집들 사이를 헤쳐 나와 선 곳은 그래도 다른 쪽방들보다 깨끗해 보이는 문 앞.
『계세요?』 김길순 소장의 목소리에 열린 문턱 너머에서는 이중재(42), 이순덕(42)씨 부부의 환한 웃음이 반긴다.
서로가 불쌍해 함께 살고 있다는 부부는 난방비를 아끼느라 보일러도 꺼놓고 있었다. 영하 10도나 돼야 보일러를 돌린다는 그들에게서는 그러나 삶의 곤궁함이 보이지는 않는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다는 이 부부는 행복의 비결을 묻는 물음에 서로의 얼굴을 웃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마치 「특별히 해줄 건 없지만 서로가 의지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족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트럭 운전을 하다 결핵을 앓으며 일을 그만 두고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는 중재씨와 식당일에 이삿짐 나르는 일 등 안해본 일이 없다는 순덕씨, 고행에 지쳤다는 이들은 이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지난 97년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은 올 6월 「함께 하는 집」에서 꿈에도 꿔보지 못했던 결혼식을 올렸다. 50여명의 신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면사포와 턱시도를 차려 입은 두 부부는 서춘배 신부(서울 제1지구 사회사목담당, 해방촌본당 주임)의 주례로 혼인예식을 치르며 하느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었다. 이 날도 수줍게 결혼 앨범을 꺼내 보인 부부는 이 행복이 계속 자라길 기원하는 모습이었다.
『저희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있다는데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소박한 마음들이 평화를 얻어 가는 모습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자라는 모습이 엿보였다.
# 희망 넷
장정 하나가 눕기도 어려운 좁은 방,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방안에 두 여인이 누워 있다. 두 여인 사이엔 포대기를 뒤집어 쓴 갓난아기가 버둥거리고 있다. 태어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아기는 아직 세상의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 강진심(가명·22)씨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의 권유로 아기를 낳기는 했지만 키울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 몸을 푼 엄마 곁에서는 비슷한 나이의 또 다른 여인이 배앓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 또한 출산을 앞두고 있다. 주위의 쪽방 사람들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연신 두 여인의 방문을 열고 안을 살핀다.
쪽방에서도 아이들이 나고 자란다. 아이는 누구에게나 기쁨이지만 쪽방 사람들에겐 기쁨은 잠시고 아이와 함께 이겨나가야 할 고통의 시간은 길다. 그래도 아이는 고단한 삶에 의지가 된다.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오실까요?』
쪽방에서 만난 봉사자의 물음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가 눈길을 두고 관심을 쏟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 생각하게 한다.
「함께 하는 집」이 문을 열면서 쪽방 거리에는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수십년을 정체된 채로 살아온 쪽방 사람들에게 「함께 하는 집」은 복음과도 같다. 처음으로 자신들을 찾아주고 먹거리를 걱정해주는 이들이 주위에 있다는 든든함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는 고마움과 기쁨 등 수십년간 잊어버리고 살던 인간적인 감정이 새롭게 샘솟는 것이다.
1년 내내 산타클로스가 돼 가난한 이들을 찾고 있는 「함께 하는 집」봉사자들에게 성탄은 이렇게 늘 가까이 있다.
『가장 미천한 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고통을 대신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오늘날 우리들이 마주할 수 있는 마구간이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잊혀진 곳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 쪽방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봉사자들은 오늘도 함께 하는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도움주실 분=한빛은행 702-04-107874 예금주 : 가톨릭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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