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월 1일 평화의 날을 맞아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다"는 제목으로 담화문을 발표해 지난해 테러와 그에 이은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정의와 용서를 바탕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할 것을 호소했다.
1. 올해 세계 평화의 날은 지난 9월 11일의 비극적 참사의 그늘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그 날 이후 전세계 사람들은 인간 개인의 철저한 나약함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심리 상태 앞에서, 죄악의 신비 곧 악이 인간사의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확신에서 교회의 희망을 증언합니다. 제가 심사숙고한 끝에 이르게 된 확신은 정의와 용서를 겸비한 대책이 아니면, 무너진 질서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의는 언제나 깨어지기 쉽고 불완전하며,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가 따라야 하며, 용서를 통해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원한과 보복에 대립되는 것이지 결코 정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2. 오늘날 국제 테러 행위의 공격 대상은 바로 정의와 용서에서 비롯되는 평화입니다. 테러 행위는 흔히 자신의 진리관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생기는 광신적 근본주의의 소산으로서 증오심과 인간 생명의 경시에서 일어나며 정치적 군사적 수단으로 이용되므로 참으로 그 자체가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테러 행위에서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리는 어디까지나 목적과 수단의 선택에서 도덕적 법률적 한계를 존중하면서 행사해야 합니다. 또한 테러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당신 모습을 새겨주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결국 테러 행위는 인간만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 지도자도 테러 행위를 묵과해서는 안되며, 선동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3. 용서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는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을 억누르는 개인의 선택이며 마음의 결단으로서 온전히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이 결단의 기준은 죄인인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마태 6, 12)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너그러이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 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용서는 실질적인 장기간의 이익을 위하여 표면적인 단기간의 손실을 감수하지만 폭력은 정반대입니다. 용서는 나약해 보이지만, 용서를 해주거나 받을 때 커다란 정신적 힘과 도덕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4. 여러 그리스도교파들과 세계의 대종교들의 지도자들은 테러 행위의 사회적 문화적 원인을 제거하는 데 협력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가르치고, 인류 가족은 하나라는 더욱 분명한 의식을 널리 심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긴장의 고조와 완화를 반복하면서 현재까지 50년 이상을 끌어 온 아랍 민족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더욱 강력히 촉구하게 하며 예수님께서 생활하시고 돌아가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거룩한 땅에 사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상호 존중과 건설적인 화합의 새 시대를 위하여 일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5. 바로 그러한 이유들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는 결코 평화 활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인간의 마음에 넘쳐 흐르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정의를 위한 기도이며 자유, 특히 모든 개인의 인권과 시민권의 바탕인 종교 자유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며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용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에서, 저는 2002년 1월 24일에,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시시에 모이는 세계 종교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올해 평화의 날에 모든 신자가 테러 행위의 희생자들과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는 그 유가족들을 위하여, 그리고 테러 행위와 전쟁으로 끊임없이 고통받고 상처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더욱 간절히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모든 인류 가족이 정의와 자비의 결합에서 생겨나는 진정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얻게 되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세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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