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들은 다양하다. 자신의 관심과 활동 영역에 따라, 또는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 취향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를 나름대로 평가함으로써 때로는 호감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세평에 가볍게 휘둘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언자적인 교회의 삶이기도 하겠지만 교회와 신자 공동체가 참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간다면 세상은 그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견할 것이다. 특별히 종교계의 소식을 전하는 일간지 종교 담당 기자들은 가톨릭을 비롯한 국내 종교계 전반을 종합 취재하는 일선 기자들로서 교회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가톨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세 명의 중앙 일간지 종교 담당 기자들로부터 들어본다.
■ 이선민 기자(조선일보)
“잘 짜여진 신앙공동체 실감”
▲ 이선민 기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네 딸마저 다 출가시킨 장모님은 노년에 혼자 사시면서 성당에 나가시는 걸 큰 즐거움으로 삼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장모님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처가 식구들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그런데 유족들의 이런 걱정을 덜어준 것은 장모님이 다니시던 성당의 교우들이었다. 소식을 듣고 빈소가 마련된 병원 영안실로 달려가니 벌써 연령회 분들이 오셔서 돌아가신 분을 위한 연도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영안실을 돌보아주셨을 뿐 아니라 장지까지 많은 분들이 함께 가셔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주셨다.
당시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톨릭이 지닌 힘을 느낄 수 있었다. 2000년을 내려오면서 만들어진 잘 짜여진 조직과 전통을 바탕으로 형성된 강력한 신앙공동체가 지닌 위력을 실감했던 것이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을 떠받치는 기본적인 요소는 하느님과의 관계이겠지만 이처럼 교회와 신자, 신자 상호 간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가톨릭에 대한 이런 인상은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더욱 강해져갔다. 아마도 인류가 만들어낸 조직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특히 사회복지 관련이나 빈민 노동 등 특수 사목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났을 때 그런 생각이 더했다. 그 분야의 다른 종교 종교인들이 대부분 개인적으로 힘들게 활동하고 있는 반면, 가톨릭은 조직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훨씬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가톨릭이 지닌 또 하나 장점은 다른 종교에 비해 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제나 수도자의 교육 기간과 과정이 잘 정비돼 있는 것은 물론 신자들에 대한 교육 재교육도 다른 종교보다 훨씬 앞선다. 불교나 개신교가 내부에 상당한 편차를 갖고 있어서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는 것과는 달리 가톨릭은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톨릭 관련 취재에서 좋아하는 것은 성지 방문이다. 어쩌다 7년씩이나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다 보니 국내외의 많은 성지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96년 '한국의 성지'를 연재하면서 국내의 유명 가톨릭 성지는 대부분 가 보았고, 작년에는 '신앙의 고향을 찾아서' 기획 취재 때문에 아시시 수비아코 몬테카시노 등 이탈리아 성지들을 방문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발길이 머물렀던 가톨릭 성지를 찾을 때면 별로 영성이 깊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도 신앙의 비밀을 엿보는 것 같은 감명을 받는다.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단합에 비해서 외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가톨릭 전체로서는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계속 발언하고 있지만 그런 움직임이 일선에까지 충분히 전달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조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선 본당들이 좀 더 활발하게 움직여서 지역 사회의 활력소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 송평인 기자(동아일보)
“평신도 의지 더 반영되길”
▲ 송평인 기자
하지만 한국 천주교는 이를 계기로 우리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사형제 폐지' '응급피임약(혹은 사후피임약) 시판불허' 등의 문제를 적절히 제기해 사회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한국은 종교분야가 사회의 다른 분야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발전한 나라다. 천주교의 경우에도 급감하고 있는 성직자의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유럽 미국 등과는 좀 다른 상황인 것 같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인데, 특히 사회지도층에서 많은 신자를 갖고 있는 천주교가 우리 사회의 윤리적 결정에서 균형추 역할을 다하는 것은 대체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피임 이혼 등과 같은 보다 일반화된 문제에 대해서 젊은 세대들이 납득할만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젊은이들에게 낙태 피임불허 등만을 고집하기에는 우리나라의 성문화도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거나 오히려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그 수준을 넘어버린 느낌이다.
하나의 보편교회에 속한 한국 천주교가 바티칸 교황청의 입장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교구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더라도 평신도 차원에서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눈에 띄었으면 한다.
일간지 종교기자들은 누구나 천주교에 관한 기사를 보다 많이 지면에 반영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일간지는 대체로 1주일에 한면을 종교에 할애한다. 이건 아시아의 유교권 국가에서는 우리나라만의 유일한 관행이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종교적'이다. 일간지 종교기자들은 사회에서 그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과는 상관없이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기사가 종교면에 고른 분포로 들어가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그러나 대체로 보면 기사의 양은 늘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의 순이다.
최근에 한 독자로부터 '왜 당신은 천주교 기사는 쓰지 않고 개신교 불교 등에만 편중하느냐'는 항의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작년은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행사가 줄줄이 이어져 그 어느 해보다 천주교 기사를 많이 썼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런 반응을 들었다.
천주교는 불교나 개신교에 비해 취재하기가 좀 어려운 구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늘 갖고 있다. 언젠가 사내의 누군가로부터 천주교의 어느 지방교구에 관한 행사 기사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내용을 보니 기사가 되겠다 싶어 교구청에 전화를 하고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봤는데 도무지 기자가 궁금해하는 것을 설명해주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중간에서 취재를 중단한 적이 있다. 한국 천주교도 매스컴 관계에 대한 인식제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 조연현 기자(한겨레신문)
“감격스런 외침…‘내 탓이오’”
▲ 조연현 기자
김추기경의 답은 내 질문을 무색케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싶은 열정이 있었지만 용기가 부족해 그런 사람들과 먹고 자지 못하고 일이 생겼을 때 방문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자책했다 그는 형 김동한 신부처럼 장애인들과 함께 뒹굴며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가 젊은 시절 형과 같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그의 말처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누구도 입을 열기 어려웠던 때 입을 열어 말하고, 누구나 떠들 때 침묵하는 용기를 보여준 그지만, 자신이 용기가 없다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용기야말로 가장 큰 용기가 아닐까. 그의 답에 무안해지기보다 청량감을 느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이 땅에서 김추기경이 늘 주창한 '내 탓이오' 운동만큼 깊은 인상을 심어준 운동은 드물다. 남 탓만을 할 때 인류의 문제는 커녕 가정의 문제나, 개인의 문제조차 해결될 길이 없다. 설사 남 탓을 통한 강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할지라도 그것은 문제를 더욱 깊게한 채 '해결'한 것처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나 또한 가정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너가 문제다"라는 주장으로 일관해오다가 자신의 문제를 자각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함께 온몸에 퍼져들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가슴을 두드리며 "내 탓이오"를 외치는 미사장면을 볼 때면 미숙한 인류가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 듯한 감격에 젖는다.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만큼 남탓과 적대감을 부추긴 것도 드물다.
교황이 지난해 교회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상 초유의 참회미사를 집전한 것은 스스로를 불사르는 초극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중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 저항하지 못한 점이나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등에 대한 실수에 대해 겸허히 용서를 구했다.교황은 또 지난 81년 자신의 복부에 총격을 가했던 메흐멧 알리 아그차를 용서해 사면을 이끌어냄으로써 '눈에는 눈'이 아니라 사랑으로 증오를 녹여냈다 그러나 적대감만이 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식으로 여겨온 인류에게 '내 탓이오'로의 전환은 내면을 온전히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용기나 우리가 너나없이 한 형제라는 깨달음이 없인 불가능한 일이다.
교황이 용서를 청할 때도, 한국 천주교가 참회를 해야한다고 할 때도, "우리가 더 박해받았는데, 왜 우리가 먼저 참회해야하느냐"라는 주장은 언제나 제기될 수 있다. 그 때가 갈등이냐, 평화냐를 가르는 분기점의 순간이다.
'상대방 죽이기'만이 만능인 정치, 자신의 탓은 없고 남 탓만 있는 교육과 경제, 그리고 언제든 남북관계에서 남 탓을 찾기 위해 번득이는 눈들…. 이처럼 늘 이기심이 앞설 때 이에 동조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하늘이 주관할 수 있도록 닫힌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도록 이끄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가톨릭만의 행운은 아니다. 오늘은 마더 데레사 수녀의 말대로 '탓'을 거두고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영혼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될 뿐인 타인의 결점 찾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만을 찾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