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조금만 요동치면 위급한 환자도 속수무책 기다려야만 했다. 신안대우의원이 제자리를 잡기 전까진. 이충열·장용선 의사 부부는 365일 섬사람들의 건강 밝히는 등대. 앞으로는 섬노인들을 위한 요양병원 운영을 꿈꾸며 오늘도 섬사람 무공해 웃음을 지키기 위해 분주하다.
"평소에 숨차고 힘들지 않으셨어요?"
"……"
"여기 아파요?"
"답답해… 숨이 가빠…"
3주 동안 심한 기침을 했다는 할머니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얼핏 보기에도 상태는 심각하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한숨이 나온다. 폐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희뿌옇게 보이는 폐의 상태는 폐암이나 결핵을 짐작케 했다. 쇠약해진 할머니의 건강 상태로는 약물치료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목포로 나가 정밀검사를 해볼 것을 당부하고 당분간 통증을 해소할 약만 우선 지었다.
의사로부터 노모의 상태를 들은 아들은 황당하기만 하다. 다만 몇 주전부터 기침 한 것밖에 없는데 폐암이라니, 결핵이라니….
장용선 부원장(젬마·37·광주대교구 석문본당)은 '병'이란 것에 무감각해져 있는 섬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땐 안타까운 마음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담담해졌다. 치료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못한 섬의 의료현실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후 뒤늦게 의대공부를 시작했던 이충열 원장과 수녀가 되는 준비의 하나로 의사가 된 장용선 부원장은 일찍부터 농촌진료에 관심을 가져온 의사 부부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회원인 이들 부부는 이미 지난 91년부터 4년간 전북 장계성모병원에서 농민들 곁을 지켜온 경험이 있다. 인의협이 진도, 완도, 신안대우의원을 위탁운영하게 되면서 의료사각지대인 도서지역 의료활동을 위해 주저함 없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섬으로 내려왔다. 한솔(스테파노·중 1), 하늬(바오로·초 5), 로사(초2), 마태(마태오·5)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이원장은 사비를 털어가며 섬마을 주민들의 의료실태조사에 발벗고 나섰고 도서지역 병원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앞으로는 환자들에게만 필요한 병원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문화적인 혜택을 베풀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10여년간 전북 장계, 서울 빈민지역, 전남 신안 등 소외지역에서 1차 진료를 맡아온 이들은 요즘 의학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전 분야를 두루 알아야하는 시골의 유일한 병원인 만큼 의사들의 몫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충실한 삶만큼이나 신앙도 열심인 이원장 부부. 현재 장부원장은 석문본당 주일학교 교감도 맡고 있다.
월요일 오후. 가장 바쁜 오전진료가 끝났지만 남편 이충열 원장(루가·42)이 자리를 비운 탓에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에 자리한 신안대우의원. 목포에서 뱃길로 50분을 더 들어가야 닿는 섬 비금도와 이웃해 있는 도초도까지 8000여명에 이르는 섬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유일한 병원이다. 국가에서 배려한 보건지소가 있긴 하지만 보건소는 응급환자에겐 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뭍으로 나가는 배 시간만 기다릴 뿐,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다.
이러한 지역에 신안의원이 생긴 건 지난 79년. 대우재단에서 병원을 세우면서 드디어 이곳 섬에도 병원다운 병원의 의료 손길이 뻗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뿐, '도서지역 의료지원'이라는 처음 취지와는 달리 부실한 관리로 인해 주민들에게 멀어졌다. 아픈 사람들은 다시 목포로 나가 시간적, 경제적 부담을 이중으로 짊어져야 했다. 비금도에서 목포에 있는 병원을 다녀오려면 이틀은 기본이다. 배시간과 진료시간이 맞아 떨어지질 않기 때문이다. 배로 드는 시간과 돈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응급상황을 넘기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지난 10년간 병원으로서 제기능을 못하고 폐쇄 위기를 맞았던 신안의원이 다시 열린 병원으로,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병원으로 탈바꿈한 것은 불과 3년 전의 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위탁운영을 맡으면서 이원장 부부가 이곳으로 내려왔고 병원 경영과 진료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았다. 6명에 불과했던 의료진은 이원장 부부와 공중보건의, 6명의 간호사, 약사 등 20명으로 늘어나 현재는 주민들에게 만족스런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신안의원은 의원에 불과한 1차 진료기관이지만 섬이라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병실과 응급실을 필수적으로 갖춘, 대도시의 웬만큼 규모가 큰 병원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 응급환자와 입원환자 때문에 매일 밤 당직을 서야하는 건 세 명 의사들의 필수업무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섬마을은 일찍 불이 꺼지고 컴컴한 바다를 비추는 무인등대의 작은 불빛과 24시간 365일 열려 있음을 알리는 신안의원의 환한 불빛만이 섬을 밝혔다.
화요일 아침. 새벽녘에 어김없이 응급환자가 당직의사의 잠을 깨웠지만 간단한 치료로 마무리지었다. 오늘부터는 일주일간 65세 이상 노인들의 무료 폐렴예방접종이 시작된다. 주사를 맞기 전 예진이 있어야하기 때문에 장부원장과 공중보건의는 아침부터 밀려드는 노인 환자들을, 이원장은 예약 환자와 진료 환자를 맡았다.
이충열 원장은 지난해 의료기기 교체 후 전자내시경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내시경 검사를 할 수 없었을 땐 식도출혈이나 위장출혈 환자는 목포로 후송되는 동안 죽어가기도 했다. 지금은 초음파 검사기, 전자내시경 등으로 웬만한 검사는 다할 수 있어 응급상황을 훨씬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이원장 부부의 친절함과 성실한 진료, 섬사람들에게 다가서려는 마음은 환자들과 주민들에게 신뢰를 줬다. 이젠 비금도 사람들도 이원장 부부는 물론 병원사람들을 그들의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후2시30분. 심장통증을 호소하는 응급환자가 들이닥쳤다. 심전도검사로 봐선 급성 심근경색이다. 신안의원에서 손을 쓸 수 없는 환자다. 119 헬기를 요청했다. 폭풍주의보가 내려 배도 뜨질 않았고 시간이 급했기 때문이다. 응급처치 후 헬기에 태워 목포로 내보냈다. "휴"하고 한숨 돌리지만 헬기를 요청할 때면 새삼 이곳이 소외된 섬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겨울이면 수시로 내리는 폭풍주의보 때문에 배가 뜨지 않는 날이 많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헬기를 요청하게 되고, 헬기가 뜨지 않는 밤에는 목포 해양경찰청 군함을 이용하거나 어민들의 사선을 요청해야 한다. 이같은 섬의 특징 때문에 이들 부부가 받아낸 아이만 해도 벌써 10명이 넘는다.
섬에서의 응급환자 처치와 후송도 문제지만, 독거노인 등 노령인구가 많은 이곳에 그들을 위한 의료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원장 부부. 먼 훗날 요양병원 운영을 꿈꾸며 오늘도 두 시간을 꼬박 걸어온 할머니 환자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청진기를 먼저 대어보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원장 부부는 생명복제를 시도하는 오늘날의 생명공학기술이 섬사람들과 병들어가는 노인들을 위해 쓰여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