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선교열의로 전국 최고의 새 신자 수를 기록하며, 하루하루 늘어가는 신자들과 함께 신앙을 다져가던 군산본당(현재 둔율동본당) 사목시절. 해방 후 이제 본당이 자리가 좀 잡히려하는데 6.25 사변이 발발했다. 군산엔 미군정 당시 들어와있던 많은 미군들과 항만 사령부, 비행장 등의 주요 시설들이 있었다. 나는 미군들의 미사를 비롯해 많은 일들을 돕고 있었다.
당시 교구장이셨던 김현배 신부님은 두 번씩이나 나에게 사람을 보내 『신부님은 우리 교구 내에서 미군들과의 접촉이 가장 많았던 분이라 공산당들은 신부님을 미국의 앞잡이로 여겨 총살할 것이니 속히 피난을 가라』고 이르셨다. 하지만 나는 신자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없어 『죽어도 신자들과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답변을 드렸다.
공산당들이 밀려오자 어쩔 수 없이 숨어야 했다. 공산당들은 신부들을 「신부 X새끼」라고 부르며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마을에는 고정간첩들도 있어 내가 대야쪽으로 피난을 가려하니 피난 장소를 물으며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래서 병자성사를 주러 간다고 나서면서 그때에 바로 대야면 지경리 박베드로 공소회장님 댁으로 피했다. 회장님댁 골방에서 숨어 지낸 3개월의 지루한 피난살이 동안에는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 성무일도 등 기도로 보냈다. 매일 새벽 4시면 주변 신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또 농사일을 가는 것처럼 꾸며 미사에 참례하러 모여들었다. 모두들 공소회장댁에 신부가 숨어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 신경을 써주었다.
어느날은 공산당원들이 찾아와 이곳 저곳 수색을 하더니 내 손까지 검사했다. 그리곤 내 손에 농사일로 인한 굳은살이 없는 것을 보고는 『일제와 미군 앞잡이였던 경찰이 아니냐』며 우겨댔다. 놀라긴 했지만 난 태연하게 『이발소 일을 돕는 직공』이라 말하고 『이발소에서 머리를 만지고 감겨주고 하니 굳은살이 없는 것』이라며 위기를 넘겼다. 당시 공소회장님은 농사를 크게 짓고 있었지만 이발소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주님의 은총으로 군산이 수복되고, 성당에서 드린 첫 주일미사 때에는 모든 신자들이 재회의 기쁨과 감사로 눈물을 흘리며 미사를 봉헌했다. 숨어있을 때 가장 큰 걱정은 새로 영세한 신자들의 신앙생활이었는데 모두들 열심히 신앙생활을 꾸려왔다는 이야기에 더욱 감사드렸다.
이밖에 군산본당 시절에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미군들의 도움으로 대야성당도 지었다. 정읍본당 시절에 만났던 군종 글래런 화이트 신부 덕택에 전주 성모병원의 전신인 시약소도 지을 수 있었다. 또 교회 묘지 3000평과 본당에 인접한 대지 2000평을 구입해 성당부지로 다지고, 성심유치원도 창설했다.
1952년 여름, 피로가 겹쳐 건강이 많이 나빠져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다른 본당으로 옮겨 달라 청했다. 교구장께서는 신자 수가 좀 적은 부안본당으로 발령을 내셨다. 당시 송별 미사는 초상집을 방불케했다. 신자들은 발령을 취소해달라고 교구장께 탄원서도 올리고 혈서를 10통이나 썼다. 또 조를 짜서는 사제관 앞에서 감시하고 서서 내가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막았다. 결국에 떠나기로 한 날 부안으로 가지 못했다. 당시 나는 미군부대에 미사하러 갈 때면 지금의 스쿠터 같은 조그마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며칠 후 나는 미군 부대에 간다고 속이고는 그 조그만 오토바이를 타고 털털거리며 부안성당으로 내달렸다. 옷가지며 책 같은 개인 소지품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한 상태였다. 짐은 부안본당 주임이었던 강윤식 신부님께 『내가 군산에 가거든 싸서 보내줄 수 있으면 보내달라』고 했다.
부안에서는 건강을 추스리며 본당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성인 세례자도 20명이나 생겨났고, 본당 재정도 자립할 수 있었다. 게다가 김제 요촌 본당의 부지 5000여평도 아주 싼 가격으로 마련해주었다.
1년 6개월 후 건강이 좋아지자 성당 신축이 시급한 중앙성당으로 이동하게 됐다.
중앙 본당 주변은 가난한 이들과 전쟁 난민들이 주로 모여사는 빈촌이어서 성당 신축을 위해 모금을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되레 본당에서 신자들의 생활을 도와줘야 할 형편이었다. 발령 후 열심히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하며 먼저 마음의 성당을 지을 것을 신자들에게 호소했다중앙본당 재임시절에는 교구의 일도 함께 도왔었다. 당시 전주교구에서는 토지개혁으로 받은 지가보상금으로 전북제사공장을 인수, 운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적자 운영의 원인을 찾아보니 원사(原絲)의 부정유출이 있었다. 밤마다 감시를 시작했다. 통행금지된 시간에 가로등도 없이 컴컴한 길거리에서 숨어 미행하기를 열흘 쯤 했을까, 물건을 빼돌리는 트럭을 추적하고 범인들을 잡았다. 교구에서는 이런 여러가지 일들과 운영관리 미숙 등으로 제사공장 운영을 포기하고 부지 3500평 정도를 건졌다. 지금의 시청과 중앙성당 주변인 그 대지에 교구장께서는 100~150평 정도로 중앙성당을 신축하라고 이르셨다. 교구에서는 전쟁 후라 경제가 너무 어려워 큰 성당을 짓기엔 역부족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중앙본당은 나중에 신자들이 크게 늘 위치라며 큰 성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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