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시절에 들었던 우화 하나가 생각난다. 어느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장상이 후학들에게 배추를 주면서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명령했다. 그들 중 일부는 장상의 말씀대로 배추를 거꾸로 심었지만 소수의 사람은 아마도 스승이 잘못 말씀하셨을 것이라 추측하고 배추를 똑바로 심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승은 스승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배추를 똑바로 심은 이들에게 질타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에는 머리 있는 순명보다는 절대적인 순명만이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순명이 최상의 길이 아닌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위한 겸손과 순명은 신앙의 차원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현대에서 하느님의 자리가 더욱더 축소되어 가는 것은 어쩌면 「머리 있는 순명」「이유 있는 순명」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이다. 오늘 복음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을 전해준다.
첫번째 사건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일이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였다. 때문에 어떻게 본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공동 번역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그분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기에 이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셨을까?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였다는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죄인들의 공동체에 함께 함이요, 죄인들인 인간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탄과 강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처지로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죄인들과 연대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그분이 우리가 신앙하는 구원자시라는 것이다.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우리 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독특한 점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먼저 하늘이 열린다. 하늘은 막연한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는 장소를 상징한다. 이러한 하늘의 문은 아담의 죄로 닫혀버렸기에 하늘과 인간 세상과의 통교의 길이 막혔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이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는 것이요, 인간이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는 것. 비둘기는 성서에서 자주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때문에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은 유다인의 전통은 세상 창조 때에(창세기 1, 2) 물 위에 감도신 영을 비둘기 모양으로 연상하기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어떻게 해석하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리셨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가 예수님의 세례로부터 시작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세례사건은 죄인들과 연대하시는 겸손의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그로부터 시작됨을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의 협력과 예수님의 절대적인 순명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의 논리로도 이해 될 수 없는 일이었고,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신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하느님의 원하심'에 대한 그분들의 절대적인 순명이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갖가지 변명과 논리로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모토로 삼는 오늘의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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