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수가 훨씬 적었던 70년대에도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서 십자성호를 긋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신자 400만 시대인 요즈음은 오히려 그런 모습들을 더 찾아보기 어렵다』
신자들의 신앙실태 취재에 나서면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일선 사목자들은 시대사조에 따른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신앙마저 교도권이 아닌 자의로 해석하고 신앙 생활을 위한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마저 교조주의적으로 치부하는 탓이라고 진단한다.
이는 각종 조사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개신교나 불교 등 타종교 신자들보다 질적으로 낙후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2000년에 발행된 가톨릭신문 창간 70주년 신자의식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가톨릭신자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응답한 신자 비율이 82.6%로 87년의 91.1%에 비해 현저히 감소했고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비율은 8.9%에서 17.4%로 10년 사이 거의 두 배나 증가했다. 천주교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들이 신자임을 드러내고 살지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직장동료들조차 신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내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올바른 신앙은 자신의 확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 가능하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모범적 삶이 사회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고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자임을 드러내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적극적인 표현은 바로 십자성호다. 십자성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면서 십자가 희생의 결과인 구원에 대한 희망을 드러낸다. 또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자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는 외적 표지이다.
박해시기에 십자성호는 배교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고 순교자들은 처형직전에 항상 십자성호를 그으며 순교의 칼을 받았다.
교황청 내사원이 펴낸 2000년 대희년 기간동안 대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과 방법들을 담은 「대사 편람」에서는 식당 등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식사전 기도를 바치는 등 신앙을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행위를 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성호는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 행위이다. 오늘 아늑한 하느님의 품을 생각하며 천천히 십자성호를 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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