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CNS】북경의 지하교회 주교 마티아스 페이 씨앙데 주교가 최근 83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중국 정부는 페이 주교의 장례식에 다른 지역의 신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1월 2일 거행된 장례식에 수백여명이 참석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례식에는 각지로부터 방문한 수천명의 신자들로 성황을 이뤘다.
페이 주교는 지난해 12월 24일 허베이성의 장지아쿠에 있는 한 병원에서 선종했다.
중국 공안 당국은 최근 발표에서 300명 미만의 조문객이 주교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산하 통신사인 피데스에 따르면 3천여명이 장례미사에 참석했으며 이날 장례식은 지하교회 사제 2명과 애국회 소속 사제 4명이 공동으로 집전했다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빌어 보도했다.
피데스는 또한 비록 정부가 페이 주교를 주교로 공식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전했다.
페이 주교는 지난해 4월 이후 가택 연금 상태였으며 감시 경찰은 그가 신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감시를 계속했다.
피데스는 페이 주교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고 지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 교구내의 사목활동을 계속해왔으며 허베이성 지역에서 보편교회와의 친교 증진에 애써왔다고 말했다.
페이 주교는 애국회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단순한 신앙과 온유한 성품으로 애국회 사제들로부터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피데스에 따르면 1월 2일 주교의 장례식이 거행되기 며칠 전부터 전국에서 그를 존경하는 신자들이 방문해 수백여명이 매일 빈소 앞에 줄을 섰다고 한다.
페이 주교는 1918년 장지아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13세때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48년 사제품을 받고 북경교구의 젱씬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49년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강제로 세속 직업에 종사해야 했고 북경의 한 제약 공장에서 일했다.
문화혁명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 기간 동안 그는 혹독한 고통을 겪고 1970년 10년형을 언도받고 강제수용소에 머물러야 했다.
1980년에 풀려난 페이 주교는 북경으로 돌아와 1989년 비밀리에 주교로 임명됐다.
세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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