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적막 속에 들어앉아 주위의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자. 과연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의 얼굴들은 몇이나 될까. 잘하면 수십명은 되리라 싶다. 화가이자 신부, 신부이자 화가인 조광호 신부가 「조광호의 그림과 글, 얼굴」(샘터/295쪽/2만원)이라는 제목으로 책에 담은 130명의 얼굴들은 그래서 경이롭다.
내가 머리 위로 떠올린 얼굴들은 그야말로 많이 사랑하거나 간혹은 미워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보면 얼굴이 갖는 의미는 사랑이나 미움, 안타까움, 연민 같은 우리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하다.
조광호 신부는 이러한 감성의 움직임을 포착해 진정한 존재자에 대한 물음과 그리움을 제시한다. 그가 그린 얼굴들은 한결같이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극적인 순간에 포착해 표현해내고 있다.
사제나 음악가, 시인, 상인, 노동자, 가난한 사람, 이웃 아낙네, 친구들의 얼굴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흠뻑 밴 공감과 연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130여개의 다른 표정을 가진 얼굴들은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오직 한 사람의 얼굴일수도 있을게다. 누구나 느낄 수 있고 누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의 동요들을 조신부는 이 책 한편에서 얼굴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 안에서 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얼굴의 선에 의해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을 희로애락 네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얼굴'의 얼굴 그림들이 품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모든 얼굴이 하나같이 구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화가이자 사제인 조신부의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창조자를 향한 절대적 믿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유한 존재인 인간의 근본적 애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특징은 이 얼굴들에는 국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그는 조신부의 얼굴 그림에서 추구하는 것이 보편타당한 미의 원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얼굴의 원형을 찾으려는 것이고 따라서 얼굴 그림에 나타난 모든 표정들은 그의 마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조광호 신부는 1967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현재 가톨릭 조형예술 연구소 대표이자 월간 「들숨날숨」 편집인. 대표 작품으로는 단일 유리화로 세계적 규모인 부산 남천 본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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