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하고 유용한 동물로 여겨지는 것이 소이다. 흔히 소는 부와 근면 정직을 상징하는데 그 이유는 소는 농사를 주업으로 했던 우리 민족에게 살아서는 유용한 노동자원으로, 죽어서는 머리에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먹거리였으며, 그리고 심지어 털이나 기름까지도 그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모두가 유용하게 생활에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민족에게 소와 같은 동물이 중동사람들에게는 양일 것이다. 사실 양은 우리 민족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동물이고 어쩌면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정도로 생소한 동물이긴 하지만 중동 사람들에게는 주요 영양 공급원일 뿐 아니라 축제 때에는 제물로 그리고 가죽으로는 옷과 텐트를 만들어 사용하는 그야말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 유목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유용한 동물이었다. 아마도 양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면 때문에 성서에서는 양을 선인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고, 우리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상하여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이 호칭을 예수님께 적용하는 것은 어린 양이 가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 때문일 것이다.
첫째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먼저 속죄 양의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사야서 42장 이하에는 야훼의 종이라는 불가사의한 인물이 나온다. 특히 53장에서는 이 인물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고 했으며 결국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반역과 악행 때문이며, 그의 죽음의 목적은 인간의 상처를 성하게 하고 병을 낫게 해주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치유와 완성을 위한 속죄의 죽음, 이것이 어린 양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의미라면 바로 이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 가지는 의미는 '희생 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쉽게 기억하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이들은 어린 양을 한 마리씩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바름으로써, 이스라엘 맏자식들은 죽음을 면하게 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노예살이에서 해방의 삶으로 옮아가게 되는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체험하였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어린 양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런 죄도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고 해방시키기 위해 희생된 과월절 어린 양을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호칭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구약의 어린 양이 자신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듯, 이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희생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습니다』( 1고린토 5, 7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이 호칭의 이면에는 완전히 다르고 깜짝 놀랄만한 하나의 상징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세상의 악을 파멸시킴으로써 죄를 없애 주실 승리의 어린 양의 상징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좀 낯설게 보일 수도 있지만 요한 묵시록을 참조하면 어린 양이 가지고 있는 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권능을 가지고 선과 악의 투쟁 가운데 힘차게 오시며 천재지변과 함께 도래할 구원의 시대를 열어 젖힐 승리자로서의 어린양이요, 군주중의 군주로서의 영광스러운 어린 양에 대한 모습은 신약성서적 묵시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데,(요한 묵시록 7, 17 17, 14) 아마 이러한 모습도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어떻든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님께 적용한 이 어린 양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다』라고 한마디로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속죄」와 「희생」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라는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어린양이 의미하는 「속죄」와 「희생」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 연중 주일을 시작하는 우리 신앙인들이 스승의 삶을 통해 보아야 할 또 하나의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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