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4월 대동본당(지금의 중앙본당)으로 이동, 우여곡절 끝에 중앙성당을 전동성당보다 크게 지을 것을 허락받아 드디어 중앙성당을 신축하게 됐다. 하지만 교구 지원금은 성당 짓는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받은 2만달러의 지원금으로 나는 우선 진안지역의 산을 샀다. 성당 지으라고 준 돈으로 산을 샀으니 당장 교구장님의 호출이 떨어지는게 당연했다. 나는 교구장님께 『성당을 지으려면 목재가 필요합니다. 또 앞으로 목재값이 오를겁니다. 하느님 사업이니까 잘되리라 믿읍시다』라고 대답을 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재값이 4배로 껑충 뛰었다. 우리는 좋은 나무들은 성당을 짓는데 쓰고, 남은 것은 팔아 되레 이익을 남겨 교구 묘지도 구입할 수 있었다. 중앙본당 사목 시절 함열본당 부지 5300여평도 살 수 있도록 도와줬다.
중앙성당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당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이 체육관처럼 지어졌다. 당시 건축물로는 획기적인 양식과 기술이 이용된 것이었다. 교구에서도 처음엔 모두들 좋다고 동의했는데 상량식 때 갑자기 무너질 위험이 있으니 기둥을 세우라고 강요했다. 나는 절대로 위험하지 않다며 처음의 설계를 고집했고, 결국 의견이 관철됐다. 완공이 됐을 때 기둥없이 시원하게 펼쳐진 내부를 보고 모두들 혀를 내두르고 기뻐하며, 설계도를 얻어가기도 했다.
1957년 1월, 교구장 김현배 신부가 주교로 임명됐다. 주교서품식은 5월 21일 중앙성당에서 거행됐는데 성가대 100여명과 3000여명의 대규모 인원이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58년 1월 남원본당의 신축을 위해 이동했다. 남원본당은 전교에서부터 큰 어려움이 있었다. 300여명의 신자 대부분이 짝교우였다. 신자들은 쌀로 교무금을 대신 내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밭 900여평을 싼값에 살 수 있었다. 남원성당을 짓고도 여력이 남아 인월공소 강당을 지어주고 묘지용 땅도 3만여평 매입했다. 당시 순창성당 부지도 남원본당에서 사주었다. 3년 3개월만인 61년 4월 임실로 전임했다. 임실에서는 황무지를 개간해 논 1400여평도 만들었다.
이후 이동한 곳이 함열본당. 64년 6월 부임 당시 함열본당 신자들은 서로 반목상태에, 본당·공소회장이며 간부들이 모두 해임된 상태였다.
그저 하느님께 맡기고 애원했다. 신자들을 위해 먼저 희생하고 특히 신자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고해성사를 자주보고 묵주기도를 매일하도록 독려했다. 15개 공소를 순시하며 큰 공소는 투표로, 작은 공소는 임명제로 회장을 뽑아 본당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도록 했다. 구역장도 투표로 뽑았다. 가장 큰 문제는 본당회장 인선이었다. 일부에서는 총회장 출마운동도 거세게 이는 부작용도 있었다. 성탄절 자정미사 후 나는 신자들에게 본당 총회장 선출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이 기쁜 날 저도 기쁜 소식 하나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본당 주소가 어떻게 되지요?』 그러자 신자들은 『익산군 함열면 와리』라고 대답했다. 내가 『우리 본당 총회장은 여러분이 대답한 대로 우리 본당 구역인 와리 구역장을 임명하고 부회장은 안대동 구역장을 임명합니다』하니 신자들은 의외라며 허탈한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힘찬 박수를 보냈다. 1965년 성체성혈 대축일에는 감사와 속죄의 뜻으로 성체거동을 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인 5000여명의 신자들이 와리 테목산 정상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약 2km를 행렬했다.
1967년 서학동본당으로 부임했다. 이곳의 사정도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서학동은 일제시대부터 빈촌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성당 신축비라고는 단돈 일원도 없었다. 비장한 각오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뛰어들었다. 나는 신자들에게 『나는 성당을 지으려고 왔습니다. 여러분도 누구든지 성당에 올 때면 돌멩이를 가져 오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어린이들부터 걸을 수 있는 노인들까지 모든 신자들이 성당에 올 때마다 돌을 날라왔다. 하나 둘씩 모인 돌은 성당기초를 다지는데 쓰였다. 성당에 오는 이들은 누구든 돌을 들고 오라고 했기에 주교님조차도 본당을 방문하실 때 예외없이 돌 두덩이를 안고 오실 정도였다. 은인의 도움으로 신축기금이 충당됐고 열심한 모습에 감동한 교황대사가 개인적으로 제대를 마련해줬다. 1969년 12월 3일 교황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가졌다. 신자들이 이날 나의 사제수품 25주년 기념식도 함께 마련해줘 더욱 뜻깊었다. 아직 성당 빚이 남은 상황이라 잔치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신자들이 각 가정에서 음식을 한가지씩 마련해와 멋진 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서학동 사목 시절에 나는 풋내기 신부였을 때부터 꿈꿔왔던 본당 단위의 사도회와 교구 단위의 사목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 사목위원회의 모체다. 나는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더많이 알고 스스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신부들 사이에 반대도 많았다. 그러나 수천명의 신자들이 있는데 회장 1명으로는 전교도 어렵고 발전도 안된다며 대 사회적 활동도 활발한 사람들을 많이 흡수해 전교 등을 활성화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사도회가 있는 본당은 눈에 띄게 발전해갔다. 한국교회 선교 150주년 행사를 계기로 많은 신부들이 사도회에 관해 인식했고, 수정 보완해가며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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