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장연. 나는 거기서부터 소달구지를 몰고 하루를 모두 써야 닿을 수 있는 심심산골인 후남면에서 1927년 1월 7일 태어났다. 옹진 앞바다가 보이는 그곳은 『장산곶마루에 ~ 북소리 나더니 이~이…』 하는 「몽금포타령」에서의 바로 그 장산곶마루였다.
그곳에는 백씨촌이 두 군데 있었는데, 추정컨대 아마도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 나온 백씨 가솔들이 부락을 이뤄 산 곳이 한 곳이었고 내가 태어난 곳은 그로부터도 한참을 산골로 들어간 또 다른 마을이었다. 앞의 백씨촌과는 달리 이 산골마을은 교우촌이 아니었고 아버님(백경심)과 어머님(김병옥)을 포함한 선조들 역시 교인이 아니었다.
이 산골마을에서 나는「천주교」에 대해서는 알지도 듣지도 못한 채 서당에서 훈장 선생님께 회초리 맞고 감따먹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 뒷산에 치명자 무덤이 있었다. 2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씨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걸 보면 아마도 박해시대에 충청도에서 교우들이 피해와서 살았던 곳 같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곳에서는 천주교와 관련된 아무 것도 없었고 모두 외인 집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아버님께서는 식솔들을 이끌고 털털거리는 소달구지를 몰아 60여리 정도 떨어진 장연읍으로 나왔다. 그게 내가 6살 때였다.
천주교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됐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인 「경애학교」에서 수녀님을 담임으로 만나고 5학년까지 수녀님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4학년 때에는 세례도 받았다. 이때 함께 세례 받은 이 중에는 교포사목 중에 타계한 장주민 신부(부산교구)도 있었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아주 역사적인 성당의 하나인 장연성당에서 부지런히 주일학교를 다녔다. 그러면서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미사 복사. 주일에 단 한 대 있는 미사 때 복사를 하는 것은 아주 큰 영광이었고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복사교리반」에서 라틴어 미사 경문을 열심히 외웠다. 당시만 해도 미사는 라틴어였고 신부님과 라틴어로 전례문을 응답하는 것은 신자들이 아니고 복사의 몫이었다. 하지만 산골 출신의 보잘 것 없는 집안의 내게 미사 복사를 하는 영광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복사를 서려면 집안도 신실한 교우 집안이어야 했다. 다만 내가 너무나 하고 싶어 하니까 그나마 맛을 보여준 것이 촛대잡이였다. 주일에는 미사가 오전에 1대 뿐이었고 오후에는 성체강복이 있었는데 이때 복사가 6명이나 필요했다. 그 중에서 아무것도 몰라도 할 수 있는 촛대잡이를 한 번 시켜주었는데 그것도 감지덕지였던 터라 두 손으로 촛대를 움켜쥐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내내 서 있던 생각이 난다.
6학년 때,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학은 지금 대입시험보다도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수학은 선생님도 감탄할 정도로 능숙했지만 국어, 작문 만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국어야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들을 사서 볼 수 없었다.
어쨋든 입학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고 선생님은 나를 서울이 아닌 평양으로 보냈다. 당시에 평양에서 유명했던 학교는 일본인들이 진남포에 세운 공립상업학교였다. 대부분이 일본인 학생들이었고 집안이나 실력이 출중한 조선인들이 약간 다닐 뿐이었다. 워낙 조선인을 적게 뽑았던 터라 시험에 떨어졌다.
그리고 입학한 곳이 15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숭인상업학교」였다.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미사 복사의 꿈을 이룬 것도, 그리고 본격적으로 성소에 마음을 두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기림리성당에서 매일 미사 복사를 하면서 어린 나에게 삶의 이상이 된 것은 바로 주임신부님이었다. 당시 신학문을 배우던 중학생, 「신세대」였던 나는 기성세대들을 약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신부님은 달랐다. 영어, 라틴어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오르간, 노래, 카드놀이 등등 학식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다른 어른들과는 달라 보였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촌 아이 눈에는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신부님 방에서 놀았고 그렇게 내 꿈은 「사제」로 굳어져갔다. 하지만 장남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아버지는 내가 은행원이 되기를 바랬다. 은행원은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결국 나는 졸업 후 식산은행에 들어갔다. 당시 최고의 은행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었고 두 번째가 식산은행이었다.
하지만 은행을 다니면서도 사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나는 낮에는 은행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밤에는 평양교구 주교관에서 숙식을 하면서 라틴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어 일본군들이 철수하고 곧이어 공산군이 진주하면서 평양은 「난세판」이 됐다. 은행원을 그만 둔 나는 본격적으로 신학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난관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부모님께 드린 말씀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은행원으로 아무리 잘 되어도 과장으로 5~6명 정도를 거느리지만 신부가 되면 수천명을 다스리게 됩니다』성스러운 사제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께 사제로서의 삶이 결코 『세속적으로도 밑지지 않는다』고 설득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