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한 문학가가 쓴 유명한 희곡에 행복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나무꾼의 두 어린 남매가 꿈을 꿉니다. 찌루찌루와 미찌루라는 이 두 남매는 꿈속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납니다. 죽음의 나라도 살피고 또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여러 나라들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두 남매는 행복의 파랑새를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 온 순간 그토록 염원하던 행복의 파랑새를 집 문에 달려 있는 새장 안에서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과 행복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내부에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갈망하고 찾고 있습니다만 행복을 발견하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이해 부족과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중 제 4주일인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참된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소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그 가르침을 주는데 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한다면 오늘 복음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산'이라고 하면 구약의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올라갔던 시나이 산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산은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었던 장소요,(마태 17, 1) 부활하시어 열한 제자에게 전도 사명을 수여했던 장소입니다. 그러기에 산은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하느님의 율법이 선포되는 곳, 그리고 '권위'를 상징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산 위에서 펼쳐지는 마태오 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내용은 하느님의 새로운 계시요, 구약의 율법을 대신하는 새로운 율법이라는 의미가 은연 중에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이 부분을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중요한 부분의 첫 시작 부분으로 참된 행복에 대한 9가지의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지면상 각각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한 번 그 내용을 훑어보고 느낀 느낌은 뭔가 개운치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된 행복이라고 선언한 것들이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쉽게 행복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앞부분의 가난과 슬픔은 더더욱 그러하고 온유와 의로움,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 그리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박해의 문제 등 모두가 그렇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머리를 쥐어짜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정말 그런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솔직한 대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역설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하면 부요와 풍요로움, 강함과 권력, 그리고 기쁨과 웃음 등이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거기에 반대되는 가난과 굶주림, 슬픔 등은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였던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행복선언은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물론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단순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싶도록 서러운 지금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배불리 먹고 웃고 즐길 하느님 나라 때문이라는 것. 즉, 비참한 현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 희망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 안에는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풍요로움이나 강함 그리고 권력 그 자체가 결코 행복이 될 수 없듯이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슬픔 그 자체도 역시 불행이 아니라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상황 자체가 행복과 불행,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를 재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과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외적인 상황을 뛰어 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정신적인 그 무엇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