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신학교 입학을 허락 받은 후 나는 은행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주교관에서 생활하면서 신학교 입학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주교관 살림과 함께 교구청 일도 봐주게 되자 막상 공부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평양교구에는 신부가 16명 있었는데 주교관에 자주 들르곤 했다. 당시만 해도 공동 집전이라는 것이 없었고 모두 혼자서 미사를 거행했기 때문에 나는 종종 하루에 다섯 분 신부의 미사 복사를 서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신부 수업을 하는 것이려니 하면서 기쁘게 받아들였다.
1946년인가 이듬해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드디어 원산에 있는 덕원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토록 원했던 것이기에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2년 과정의 예과에서는 라틴어와 교양과목들을 배워야 했다. 특히 라틴어에 있어서는 소신학교 때부터 매일 몇시간씩 라틴어를 공부해오던 다른 신학생들과는 경쟁이 되지 못했다. 철학시간, 처음부터 라틴어로 강의가 시작됐다. 도무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철학과목은 라틴어로 된 교과서가 있었다. 나는 라틴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교과서를 통채로 외우기 시작했다.
시험날. 필기시험은 없었고 모두 구술이었다. 교수 신부가 뭘 물어보는지만 알면 그 다음은 통채로 외운 교과서를 그대로 읊어댔다. 가끔 막히면 질문을 한 신부가 『뚫어주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자 교수 신부가 손뼉을 탁- 치며 『잘했어』라고 말해주었다. 방학 때 주교관으로 돌아오자 주교님께서 『공부 잘 했다며?』하고 어깨를 치셨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학장신부님이 나를 불렀다. 『문 닫을 때 조심하라』는 충고였다. 나는 묘하게도 어디를 가든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뒷발질로 문을 차 닫는 버릇이 있었다. 그후 그 버릇을 고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학교에서 체육부장과 음악부장을 함께 맡았었다. 체육부장은 쉬는 시간마다 공을 차고 놀 때 필요한 것이었고 음악부장은 내가 당시 끈질기게 오르간을 배운 덕분이었다. 이문근 신부, 최명화 신부 등 바로 윗반까지는 쟁쟁한 음악가들이 음악부장을 맡았었기 때문에 내게는 영광이었다.
철학과를 마치고 신학과로 올라가자마자 신학교가 폐쇄됐다. 신학교를 운영하던 베네딕도회와 함께 신학교도 공산당의 손에 넘어갔다. 신부들은 모두 잡혀갔고 신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평양 주교관으로 돌아왔지만 그 역시 공산당의 감시와 통제로 꼼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게도 감시원이 하루종일 붙어있었다. 사리원역에서 나를 따라 붙던 감시원을 담을 넘어 따돌리고 황해도 신천에 있는 집으로 갔다.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자는데 새벽녘에 공안원들이 들이닥쳤다. 변소에 숨어 간신히 화를 면한 나는 이튿날 다시 평양 주교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주교님은 『스스로 알아서 처신하라』고 일렀고 나는 결국 신부가 되려면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갔다. 성당에서 덕원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김성도(모세) 신부를 만나 뱃길로 월남을 하려다 그만 김신부가 붙잡혀서 며칠 구류를 살았다.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잠시 집에 들러 결연하게 이별을 고하고 사리원으로 와 성당을 찾아갔다. 이미 주임과 보좌신부는 붙잡혀갔고 몇몇 신자들이 월남을 모의하고 있었다. 이들에 합류해 밤을 틈타 산길을 걸어 남으로 향했다. 하지만 결국 경비원들에게 들켜 산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일행과 헤어진 나는 해주에 가서 또다시 성당을 찾았다. 교우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믿을만한 한 교우집으로 갔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1년 윗반이었던 지학순 주교가 숨어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교우들의 주선으로 간신히 당시만 해도 남한에 속했던 개성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하릴 없이 있던 나는 또 성당을 찾아나섰다. 개성에서 복자회를 세웠던 방유룡 신부를 만나 내 처지를 호소하자 방신부가 수용소장을 만나 그곳에서 나오도록 조치하고 서울로 갈 수 있는 차표를 마련해주었다.
서울역은 평생 두 번째였다. 한번은 중학교 때 수학여행 와서이고 그때가 두 번째였다. 물어물어 명동성당을 찾았다. 주교관에 들어가 당가신부를 만났다. 당가신부는 대신학교에 전화를 하더니 학교로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명동에서 혜화동까지, 또 다시 물어물어 길을 갔다. 마침 휴식시간인지 신학생들이 서넛씩 짝을 지어 운동장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와락 가슴이 복받쳤다. 감사한 마음으로 학장이던 윤을수 신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철학과 2학년으로 들어가 다시 신학교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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