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신학과 1학년에 올라가면서 4월에 삭발례를 받았다. 지금의 착복식에 해당되는 삭발례부터는 바야흐로 성직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수단을 입는다. 수단을 입어서 가장 좋은 일은 따로 옷이 필요없다는 점이었다. 재정적으로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매일 입는 옷을 장만하는 일도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6월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터졌다.
6월 25일 새벽녘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신학교를 에워싸고 있던 성곽 안쪽으로도 총탄과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 대표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학장이었던 정규만 신부를 찾아가 대책을 논의했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학장신부는 "아무 일 없을테니까 걱정 말라"고 학생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월남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을 겪었던 나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피신을 하는가 마는가로 이틀을 허비한 후 결국 27일 각자 흩어져서 피신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신학생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학교문을 나섰다.
아무 연고도 없고 서울 지리도 모르던 나는 명동성당으로 찾아갔다. 성당에 도착하니 미군 트럭이 한 대 서서 수녀들을 잔뜩 태우고 있었다. 미군의 제지로 트럭은 타지 못하고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윤공희 대주교로부터 약간의 여비를 받아 한강을 건너기 위해 피난민들 틈에 섞여 무작정 길을 나섰다.
광나루 언저리에 도착했다. 당시 한강에는 광나루와 한강대교 두 개밖에 없었는데 두 개가 모두 끊어져 피난민들은 수없이 줄을 서서 나룻배를 타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로 배를 기다리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강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대전교구 소속 이규남 신부와 함께 강둑에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안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배가 우리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사공이 "빨리 타라"고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배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몰려들던 인파를 뒤로한채 우리는 서둘러 배에 올랐다.
강을 건너 교회에서 운영하던 '잠실 보육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튿날 아침 수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길가의 참외밭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피난민들의 손길이 지나간 뒤라 참외는 줄기까지 모조리 파헤쳐져 있었다.
수원역에서 대전 가는 기차를 탔다. 간신히 수녀들이 끼어 탄 짐칸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천안까지 이르렀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밥을 얻어먹고 천안역으로 갔다. 남으로 남으로, 대구행 기차를 타야 했다.
기차 지붕에 올라타고 대구에 도착한 나는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며칠 지난 뒤 다시 부산으로 미군 트럭을 타고 내려갔다.
부산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린 나와 동료 신학생들은 현재의 부산교구 중앙 주교좌 성당의 전신이었던 대청동성당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만 해도 대청동성당은 전에 절로 사용됐던 곳이었다. 성당 안에까지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미사시간이 되면 자리에 누워있던 피난민들이 우루루 일어나 미사를 보곤 했다.
본당 주임신부는 신학생들을 사제관에 머물게 했지만 이내 피난 온 신부들이 많아지면서 교우집마다 한 명씩을 배정했다. 그러다가 영주동에 있는 별장으로 모든 신학생들을 보냈다. 생활비는 신부들이 한두푼씩 모아 준 돈으로 수녀들이 살림을 해주었다.
하루는 지학순 주교, 김창렬 주교가 밖에 다녀오더니 미군 부대에 취직을 했단다. 부대 식당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우리 모든 신학생들의 구세주였다. 두 사람은 미군이 남긴 음식들을 모아 가져왔고 우리는 그것으로 배를 불렸다.
오기가 난 나는 시내를 나갔다가 부산역에 '통역관 모집'이라고 쓰여진 광고를 보고 달려가 시험을 쳤다. 그 자리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나는 사흘 후 짐을 꾸려 다시 갔는데 내가 하는 일은 미국에서 부산 비행장에 도착하고 있는 미군 25사단 장병들을 맞아 한국 군속들과의 통역을 해주는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 부대가 대구 칠곡의 전선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적군의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으로 기어가서 무전을 치는 일이었다. 신호를 받은 아군은 적의 대포가 있는 지역을 계산해 공격을 했다.
아군의 북진을 따라 서울 근교, 개성에 이어 평양까지 올라갔다. 평양에서 성당을 찾아가니 주위에서 그만 부대에서 나오라고 권유, 귀대를 하지 않았고 얼떨결에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집에 다녀왔다.
집을 떠나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머니께 "곧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다음에 올때는 꼭 함께 데려가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중공군이 내려와서 우리는 다시 남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피난하는 차량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로 나는 단 한 사람의 가족도 만나보지 못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을 때 나 역시 북의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이제 내 나이 75세, 가족을 만나기는 너무 늦었다. 민족의 비극은 그대로 내 삶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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