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성체수도회(총원장=박승애 미카엘라 수녀)의 시작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인보성체 수도회 초창기 회원들이 족두리를 쓰고 허원식을 갖고 있다.
1932년 사제품을 받은 윤을수 신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제였다. 그는 학위 취득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문화원 교수를 역임,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현재 가톨릭대학의 전신) 학장을 맡으며 국내외에 그 학식을 떨쳤다. 특히 한국어판 「준주성범」을 발간하고 많은 호교 논문과 성서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자로서의 큰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학자신부로서의 길을 걷던 그가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복지사업에로 뛰어든 것은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도 서울에 남아서 공산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지하교회를 이끌고 있던 윤신부는 시민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키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관심은 자연히 버려진 고아들에게로 모아졌다. 1953년에는 한국 가톨릭 사회사업협회(Caritas Coreana, 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의 전신)를 설립,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윤신부가 더욱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복지사업에 나서게 된 것은 1956년 서독 뮌헨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사업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후부터였다. 유럽 선진 국가의 사회사업이 양로원 보육원 무료급식소와 같은 형태의 자선사업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복지 및 개발 위주의 사회사업으로 전환되는 모습은 큰 감명을 줬다. 그는 자선사업이나 소규모 시설 사업의 형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 사회사업도 광범위한 사회복지사업으로 전환돼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1956년 11월 19일 골롬바사 내에 사회사업 전문인재를 양성하는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곳의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사업과 함께 전교활동도 할 수 있도록 교리신학, 윤리신학, 전례, 영성신학, 교회사, 라틴어, 종교음악 등의 과정을 수료했고, 주말에는 보육원, 산간벽지 등에 나가 현장 실습을 했다. 윤을수 신부와 당시 정부는 장차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대학으로 발전되길 기대했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구산후생학교 내에 수도 성소자를 중심으로 수도반을 별도로 편성해 인보성체수도회의 회원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도회는 1958년 6월 5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서울교구 소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고 같은 날 24명이 첫 서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