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저자 박노자 교수는 문명역사의 초기부터 수직적 상하관계인 사제관계와 수평적 관계인 친구관계는 인간 조직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 기둥이었다고 한다. 예수와 사도들, 그리고 석가모니나 공자의 제자들을 비롯한 인류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다준 종교와 지식집단은 사제관계 뿐 아니라 친구관계로 이루어졌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한국 고대사회나 중·근세의 불교, 유교 문화에서도 친교는 교육의 일종으로 기능하면서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러한 전통과는 달리 사대주의와 멸시가 공존하는 사회라고 정의하면서 지나치게 상하관계인 수직적 관계가 한국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부 국가나 권력자들, 자기들보다 상위의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의존성과 눈치를 보면서도 우리보다 못한 국가들이나 사람들에게는 즉, 불법 외국노동자들이나 조선족, 그리고 노동자들이나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인권은 지나칠 정도로 멸시를 하는 일상적인 차별이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의 대한민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경제적 우열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인류를 평등한 인권의 소유자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아쉽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과의 만남을 전해주면서 이 여인의 신앙의 성장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는 모든 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종교도 남성들의 종교였다. 그리고 당시에 점잖고 교육을 잘 받았다는 남성은 여자를 혼자서 만나서도 안되고, 특히 결혼한 여자는 쳐다보아서도 안되었고 길거리에서 여자와 말을 나누어서는 안 되는 등, 여자들을 천시하고 무시하는 사회가 바로 당시의 유다였다.
거기에 사마리아인들은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그 지역에 이교인들이 거주하게 됨으로 이교인들과 어울려 이단에 떨어졌던 사람들이다. 즉, 남편이 5명(오늘 복음에 나오는 남편 5명은 이방 다섯 민족이 도입한 5가지 우상숭배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함)이나 있었던 복음의 여인처럼 우상들에게 몸을 판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었던 사람들로 유다인들은 상종조차 꺼리던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이러한 시대에 사마리아인이요 그리고 여성이라면 이는 충실하다는 유다인 모두가 무시하고 회피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먼저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네신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 먼저 구원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 자주 이야기하는 주제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 앞에는 경제적인 차이나, 민족, 성별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같은 차별은 인간의 작품이지 결코 하느님의 원하심이 아니라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진리와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한 참된 해방이지만 그분은 이 사회의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신다는 그분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과정이다. 즉, 사마리아 여인과 시카르 지방 사람들의 신앙 성장과정이 그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이라는 호칭에서 시작하여 「선생님」그리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신 분」「예언자」, 그리고 「그리스도」로 여인의 신앙은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인의 말을 들은 그 지방 사람들도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는 멋진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성장과정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이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공통적인 요소 2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교」와 「머무름」(공동번역은 「묵었다」로 번역하고 있음)이라는 요소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당시 관습을 깬 그분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분에 대한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시카르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과 이틀 동안 함께 머무름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게 된다.
여기서 「머무르다」라는 의미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라 시간적인 의미로 「시간을 함께 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기에 결국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예수님은 「친교 맺음」과 「시간을 함께 하는 머무름」으로 알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신앙하는 하느님은 상하관계인 수직적 관계를 통해 섬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인 친교를 통해 체험해야할 분이라는 사실을 교훈으로 준다고 알아듣더라도 그리 크게 잘못된 해석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