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혼란과 개혁시대에 일어난 영성
3)수도원의 쇄신 운동
(10) 시토회
이 역시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라 생긴 수도회이다. 1098년 몰레스므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로베르토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그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올바른 개혁이 기존 수도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자기를 추종하던 21명을 데리고 디종 근처에 새 수도원을 세워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대단히 엄격하게 지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청빈, 단순함, 은수자적 고독을 강조하였다.
한때 다른 수도회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으나 교황 파스칼 2세의 후원을 받아 시토에 수도회를 정착시켰다. 알베릭 원장이 발전시켰고 이들은 검은 스카폴라를 걸치고 희거나 회색의 복장을 하였으므로 흰 수도자로 불리기도 한다. 세 번째 원장 스테파노 하딩에 의해 조직이 완전히 정비되었는데, 이들은 봉토의 수입을 받지 않고 수도자들의 노동으로 살림살이를 꾸려나갔으며, 복잡한 수도원의 전례를 단순하게 하고, 교회 안에 필요한 가구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물품들을 엄격할 정도로 단순화 시켰다. 따라서 수도자적 청빈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개혁과 쇄신을 주도한 이들이 한결같이 청빈과 검소한 삶을 강조했음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영성 학파는 없는 듯하나 그들은 종말론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성 베네딕도의 후예들이지만 특별히 이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영성을 강조하였고 스스로 영원한 고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 여겨 현세의 애착과 관심을 끊는 수행에도 힘썼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피조물에도 관심을 보여 땅을 경작하고 동물을 사육하여 빵, 치즈 등 좋은 식료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들의 영성을 종합하면 베네딕도 성인의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모토가 생각난다. 그들은 늘 기도하고 열심히 육체노동에 종사하면서 단순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이 수도회도 속화되고 있었다. 아빠스 임명이 높은 권위(교황이나 세속 군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수도회의 회원이 아닌 이들이 아빠스가 되기도 하였으므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하여 규칙이 해이해지고 청빈 정신이 결여되어 속화되고 타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6~17세기를 거치면서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대를 지내면서 많이 쇄신되었다.
이 수도회는 위대한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이다. 그는 교회의 박사이자 마지막 교부이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25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수도회에 입회하여 그 당시 가장 엄한 수도회였던 시토회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3년 간 수련생활을 한 후 클레르보로 옮겨 아빠스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수도원 기초를 튼튼히 하고 잘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의 임종 시에는 회원이 68명이나 되었다.
그가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충실히 또한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도회를 쇄신해나가자 클뤼니 수도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두 장상은 함께 할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상호간의 성덕을 존중하고 우정을 회복하여 상호 존중하기로 하였다. 그의 열성적인 활동은 수도회 쇄신을 넘어 전체 교회의 문제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두 교황(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끌레또 2세)의 선출로 추기경단이 갈라져 있었을 때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중재자로 노력하였다.
그는 설교가였다. 교회의 단죄를 받은 아벨라의 오류를 논박하였고 프랑스 남부에서 활동하던 마니교도에 반대하는 설교와 십자군 원정을 고취하는 설교도 하였다.
그는 사랑이 많은 수도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의 사도인 성 요한의 말씀에 심취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그분을 사랑하는 데는 조건을 붙일 수 없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 있을 뿐이다. 이런 그에게 교회는 사랑의 박사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는 영혼이 죄를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서 겸손과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는 완덕을 향해 노력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더 완전하게 덕에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는 성장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이는 확실히 덜 선해진다』라고 한 그의 가르침은 수행생활에 힘쓰는 이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권고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 신심에도 뛰어난 수도자였다. 그는 『성모님께 나아가서 빈 손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할 정도로 성모공경을 강조하였다. 전통적으로 그를 마리아 학자로 손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중세기 수도원 문화에 매우 뛰어난 인물들 중의 한 분이다. 비록 그가 고전 문학에 정통하지는 못했어도 쉬운 문체로 발표한 작품들과 서신을 통하여 중세기 영성과 신비 사상을 전해준 업적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는 시토회를 대표한 수도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