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시작 3분 전. 성당에서는 성전건립을 위한 묵주기도가 봉헌되고 있을 때 사목위원인 한 형제가 급하게 성당으로 들어와서는 곧바로 고해소 쪽으로 갔다. 두 명의 신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해소 안에 사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채 닦을 겨를도 없이 고해소에 들어간 이 형제는 어떻게 고해를 했는지 모를 정도로 죄를 고백하고 보속도 하지 못한 채 미사에 참례했다.
미사 후, 이 형제한테 왜 그렇게 급하게 고해성사를 받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 형제는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 영성체를 못하고 혼자 자리에 앉아 있으면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겸연쩍게 답변했다.
신자라면 이런 경험이 한 두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성체를 하기 위해 충분한 통회도 없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급하게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어떤 신자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고해성사를 받으면 죄를 지었으면서도 고해성사를 받지 않고 시치미를 뚝 떼고 영성체 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고해성사의 참 의미, 참 은혜를 모르고 하는 말들이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자들 중에서 기쁜 마음으로 고해소를 찾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부담스럽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고해성사 자체를 귀찮아한다. 즉 온갖 악으로 뒤덮여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고, 또 죄를 짓지 않고는 험난한 사회에서 제 정신으로 삶을 살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를 내세워 고해성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 본당에서 사목위원, 단체장 등 많은 활동을 함으로써 얼굴이 알려진 신자들은 본당 신부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고백을 제대로 하지 않고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공성사 시기에는 다른 본당에서 온 사제의 고해소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진풍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셋째, 큰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야단칠 것 같아 두려워서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벌을 주는 하느님」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특히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성당에 나오는 냉담자(쉬는 신자)의 경우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렵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인자하시고 한없이 온유하신 하느님」으로 똑바로 안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느 가정에서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에게 진심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때 그 자녀에게 혹독한 벌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물며 하느님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그 어떤 중죄라도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넷째, 어떤 것이 죄가 되고 안 되는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 특히 요즘 같이 교리겮볼 공부 등 다양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아지자 조금 안다는자만심으로 자신이 스스로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자유스러운 사회분위기로 인해 죄책감이 갈수록 무디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죄를 계속해서 저지를 경우 그 죄 자체를 합리화 시켜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 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다섯째, 죄를 사해 주는 사제를 하나의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고, 사제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실제 「하느님의 죄사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고해성사를 받았지만 내심 찜찜한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지은 죄의 결과들은 그대로 남아있고 또 저질렀던 실수들을 다시 돌려놓을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죄를 들춰내면서까지 고해성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도 똑같은 죄의 반복으로 인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무감각, 시간의 부족 등의 문제로 고해성사를 꺼려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고해성사 없이 진실된 믿음과 통회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반면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갈등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갈 때 험한 시골 산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를 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 역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해성사는 진실된 통회라는 힘들고 어려운 산길에 뚫어 놓은 안전하고 쉬운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다.
또한 고해성사는 자신의 통회를 하느님과 교회 앞에 밝히고 인정받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통회로써 죄를 용서받았음을 확신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체를 모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무감 때문에, 습관적으로, 준비 없이 행하는 고해성사가 아니라 진실된 통회와 함께 합당하게 준비하여 잘 받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다시 세례 때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고, 하느님과 교회와 이웃과 화해하는 큰 은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삶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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