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일어난 사건 중 특히 2가지 사건이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한가지는 북한이탈주민 25명이 집단으로 중국 소재 스페인 대사관에 난입해 『우리는 지금 엄청난 절망에 빠져 있고 처벌의 공포 속에 살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의 불행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걸기로 결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한국행을 요구한 사건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북파 특수 공작 동지회 전국 연합회원들이 정부의 구체적 보상을 요구하며 세종문화회관 앞 도로를 점거한 채 가스통과 쇠파이프를 들고 데모를 한 사건이다. 물론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한동안 우리 사회와 정치 그리고 정신 생활 속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북한이라는 나라가 그 사건의 배경을 이루고 있고, 또 하나는 인권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그 사건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미묘한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이 사건에 임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볼 수 있는 듯하여 약간은 쓸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25명의 북한이탈주민들이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이후부터 우리사회는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면서 그들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모든 관심과 역량을 발휘하는 모습들이 신문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80년대 이후 북파된 공작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건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언론도 국민들의 관심도 정부 당국자의 배려도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인 행동일수 밖에 없다. 숫자로 보더라도 200대 25명이요, 북한이탈주민들이 그리는 희망과 자유의 땅인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분명 북한이탈주민들보다는 그들이 더 많은 공이 있을 것이요,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북한이탈주민들은 배고픔과 자유를 위해 조국을 등진 이들임에 비해 북파 공작원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물론 그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고 확인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걸었던 이들인데 이들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서는 하루만에 임시 신분증을 만들어 주고 있는 정부가 호적 말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북파 공작원들을 위해서는 뚜렷한 대책도 내어놓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가지는 이중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 사회가 좀더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선전할 수 있고 남들로부터 시선을 받는 부분 뿐 아니라 어둡고 아픈 부분에서 꽃피고 해결되어야 할 정의와 진리를 냉정하게 실현해 나가는 일, 그리고 우리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음지에서 노력한 이들이 정말로 대우받고 존경받는 사회로 만드는 일이 가장 시급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게 된다. 이날 전례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기념한다.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그것인데 이러한 사건들 안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되는 부분들이 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과(겸손한 임금님, 그들의 희망을 채워줄 승리자로서의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사건임) 십자가의 매달리신 예수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사건임), 그리고 군중들의 극단적인 환호에 대조되는 군중들의 저주와 조롱, 베드로와 유다스의 배반,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에 비교되는 예수님의 죽음까지 함께 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과 예수를 장례 지낸 아리마태아 사람 부자 요셉, 그리고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되는 그분의 역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대조를 통해 여러 가지를 묵상해 볼 수 있겠지만 특별히 필자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러한 모든 모습들 안에 하느님은 활동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어린 나귀를 타고 개선하는 예수님의 모습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어 가는 예수님 안에서도 하느님은 함께 하셨고, 환호하는 군중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조롱하는 군중들의 저주 속에서도,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여인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 속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의 배신과 심지어 유다스의 배신의 현장에서 마저 하느님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선」과 「빛」, 「승리」와 「정의」안에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악」과 「어둠」그리고 「패배」와 「불의」속에서도 여전히 그분은 함께 하셨고 그 속에서도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낮과 함께 하는 밤의 어두움에 시선을 둘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절묘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라는 요구가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