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여자수도회로서 오늘날 국제적인 수도공동체로 자리매김하는데 겨자씨 역할을 한 사람은 수녀회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다.
1839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렌 드 샤뽀땡은 열두살 되던 해, 아버지의 동창인 샨스 주교로부터 미국 미시시피주 인디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전교자'의 꿈을 키워왔다. 수도성소의 부름에 따라 21세 때 글라라회에 입회한 엘렌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단순정신을 체험하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서 관상성소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병으로 인해 수도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그녀의 열망은 1964년 「마리아의 속죄회」 입회를 가능케했고 이 때 마리 드 라 빠시옹(수난의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당시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곧 인도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됐고 여학교 기숙사, 고아원, 의원 등을 설립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을 불태워갔다. 이같은 선교열정과는 달리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선교와 공동생활을 갈망한 결과 「마리아의 전교자」로서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탄생하는 기회를 맞았다.
1877년 총장으로 선출된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 영성의 뿌리를 내려온 수도회의 보호 아래 수도회를 두고자 프란치스꼬 성인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는 1882년 10월 4일 프란치스꼬 수도3회에 가입했다. 이로써 수녀회는 1885년 교황 레오 13세의 허락을 받아 「마라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라는 명칭으로 수도회명을 변경하고 1890년 7월 17일 최종승인을 받았으며, 1896년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받았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창립 석달만에 프랑스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스리랑카, 중국, 영국, 스위스로 진출하는 등 명실공히 세계선교의 수도사명을 실천해나갔다. 1904년까지 전세계 26개국에 3000여명의 수녀들이 파견돼 학교, 병원, 무료 진료소, 검역소, 기숙사, 양로원 등 지역에서 필요로하는 사도직을 실천하면서 마리아의 전교자가 됐다.
이들의 세계선교는 일찍이 1886년 중국으로 진출했다가 순교한 7명의 수녀들에 의해 검증되고 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순교한 예수의 마리아 에르민 수녀를 비롯해 7명의 수녀는 46년 교황 비오 9세의 의해 시복됐고,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들.
58년 6월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 수녀 6명을 포함해 11명의 수녀가 당시 부산 대목구장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하게됐다.
성모여자중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머물고, 그들을 위한 활동에 힘써왔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부산 양정동 수녀원을 거쳐 현재 서울 가리봉동에 본원을 두고 있다. 78년 관구로 승격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는 30여명을 선교의 첨병으로 전세계 각국에 파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며 마리아와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실천해가고 있다.